지난 기획/특집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67)글을 쓴다는 것은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
입력일 2023-09-05 수정일 2023-09-05 발행일 2023-09-10 제 3359호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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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도 하느님께 드리는 편지와 기도였으면
글 쓰는 일은 자신을 정리하며
동시에 타자를 향한 그리움과
인정에 대한 욕망은 아닐까

편지글을 쓰고 있는 수원교구 안양 관악본당 신자들. 우리는 나를 알아주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향해 글을 쓴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 시 읽기에 관한 아픈 기억

시 읽기를 좋아한다고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오래전 어느 교구 월간지에 시 읽기에 관한 글을, 매회 원고지 30매 정도의 분량으로, 스물여덟 번이나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신학교 선생으로 살면서 논문적 글쓰기의 답답함에 살짝 지쳐있었을 때, 시 읽기에 관한 글쓰기는 저에게 일종의 작은 일탈이며 즐거움이었습니다.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제 오랜 바람을 이룰 수 있었던 기쁨이기도 했습니다. 시에 관한 글들을 쓰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시를 통해 많은 힘과 위로와 역설적 기쁨을 얻습니다. 시를 매개로 인간과 삶과 신앙에 대해 사유하고 성찰하는 즐거움도 누립니다. 좋은 시를 만나는 일, 또 그 시를 통해 시인을 만나는 일은 설레는 일이며 동시에 나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시는 인간이 언어와 상상을 통해 축조하는 가장 아름다운 존재의 집이며 지상에서 우리가 부를 수 있는 가장 신비한 노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시인들은 시대의 전위(前衛)에 서 있습니다. 시인들은 섬세한 촉각을 가졌기에 우리보다 언제나 먼저 삶을 감각하고 시대의 징후를 느낍니다. 시인들은, 그들이 가진 예지의 능력으로, 늘 우리보다 삶의 신비를 먼저 포착합니다. 시인들과 동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시집을 사서 읽는다는 것은 시인들에 대한 우리들의 작은 헌사(獻詞)입니다.”

저는 문학에 대한 전문가가 아닙니다. 평론가 김현과 신형철의 시 비평에서 볼 수 있듯이, 시에 대한 공감의 식별, 미학적 분석, 섬세한 해석은 엄청난 역량과 노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시에 대한 제 글쓰기는 시를 좋아하고 시를 읽으며 제 생의 길을 걸어온, 애독자와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시 읽기에 대한 제 연재 글을 책으로 출판하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교회 인가도 받았고, 최종 편집판도 완성되었습니다. 제 연재 글은 28명의 시인을 다루었습니다. 개별 시인의 모든 시집을 다 읽고, 시집 전체의 흐름이 매개시키고 촉발시킨 어떤 느낌과 상념들을 쫓아서 가보는 방식이었습니다. 문학적이고 미학적 차원보다는 시 속에 숨겨진, 세상과 삶과 인간에 대한 시인들의 사유와 정념들을 엿보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시인들이 자신의 시에서 사용한 단어와 문장을 통해 시인의 사유의 궤적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시 구절들의 편집과 인용이 많은 형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저작권 문제입니다. 시 전편을 인용하는 것은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시 구절 하나하나에도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시집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4개의 대형 문학 출판사 가운데서 유독 어느 한 출판사가 시 구절들에 대한 저작권료를 요청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출판사의 문학적 협량함에 속상했습니다. 마치 시에 대한 오랜 순정이 배신당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 출판사는 제가 문학청년 시절 정말 사랑했던 곳이었습니다. 시 읽기 원고는 제 컴퓨터 파일 안에서 몇 년째 머물고 있습니다.

■ “여름 가고 여름”

여름이 가고 있습니다. 기후가 변하고 있다는 현실을 절감하는 여름이었습니다. 계절은 우리가 흐르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줍니다. 지난 전반기에 읽은 시집들 가운데 인상 깊은 시집의 하나는 채인숙 시인의 「여름 가고 여름」(민음사)이었습니다. 세상의 풍경과 내면의 의식이 서로 긴밀하게 직조되어 있는 시들이 많았습니다. 무질서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초현실주의적인 시도 아니었고, 단순한 서정과 서경의 전통적인 시도 아니었습니다. 그 시집을 읽으면서 내가 어떤 시들을 좋아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들이 보여주는 서술과 서사를 제가 좋아하나 봅니다. 잠언과 전도서의 서술 형식과 내용을 제가 사랑하나 봅니다. 11세기 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카이얌의 ‘루바이야트’ 같은 시들을 말입니다.

“계절은 한 번도 표정을 바꾸지 않는”(‘우기의 독서’) 열대 인도네시아에서 오래 살아가고 있는 오십 대 여성 시인은 어떤 생각과 느낌과 정념으로 살아가는지 궁금했습니다. 거의 모든 시에서 자연의 풍경과 그것에 조응하는 시인의 내면 풍경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열대에 찬 바람이 분다// …… // 모두가 신은 없다는데/ 나는 오늘도 기도가 남았다.”(‘디엥 고원’) “시체꽃이 피었다는 소식은 북쪽 섬에서 온다// …… //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목도한 후에 비로소 어른이 되지만/ 삶이 아무런 감동 없이도 지속될 수 있다는 것에 번번이 놀란다.”(‘여름 가고 여름’)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정리하고 돌아보는 일이지만 동시에 타자를 향한 그리움과 인정에 대한 욕망인지도 모릅니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나를 알아주고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향해 우리는 글을 씁니다. 낯선 타향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며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일입니다. “시를 쓰는 것은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고”(‘다음 생의 운세’), “인도양의 저녁 해가/ 은빛 가루를 뿌리며/ 구원의 기도문을/ 써 내려갔다”(‘해변의 모스크’)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 같은 것은 쓰지 말고”, “기도해서 얻는 것을 구하지 말고”(‘제이’) 살아가자고 시인은 때때로 다짐하지만, “어쩔 수 없어 쓰는 시가/ 봄 먼지처럼 수북”(‘비인’)하다고 고백합니다.

산다는 것은 그냥 사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글을 쓰며 살아갑니다. “늙어가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습작 일기’) “보내지 못하는 편지를 쓰는 것은/ 버리지 못한 일생의 습관”(‘내가 당신의 애인이었을 때’)인 시인에게, 글을 쓰는 일은 자신이 살아가는 자리의 좌표를 확인하는 일이며 타자와 신을 향한 몸부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계절과 세월은 여전히 흘러갑니다. 글을 쓴다고 시간이 멈춰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글을 쓰며 그 시간을 견디고 건너가는 일이 어떤 한 사람의 인생입니다. “오랜 사람의 이름을 지우는 동안/ 여름이 지나간다.”(‘사루비아 화단’) “한 번도 나를 궁금해하지 않는 너를 견디느라 한 계절이 지났다.”(‘노산여인숙’)

채인숙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서 권경인 시인의 시집 「변명은 슬프다」(창비, 1998)가 생각났습니다. 두 시인 사이에는 시차적 간격이 있지만, 사물의 풍경과 내면의 풍경을 쓸쓸하게 응시하는 모습이 무척 닮았습니다. 시를 통해 시인의 서사를 상상하는 일은 오독의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시인의 삶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뜬금없이 들었습니다. “아무 한 일이 없으나 그는 그곳에 살았다/ 그가 살았으므로 그 땅은 아름다웠다.”(권경인, ‘木魚者’)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드리는 편지와 기도였으면 좋겠습니다.

정희완 요한 사도 신부(가톨릭문화와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