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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시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쓸 수 있을까? / 이대로 신부

이대로 레오 신부(가톨릭신문 기획주간),
입력일 2023-09-12 수정일 2023-09-12 발행일 2023-09-17 제 3360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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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지인에게 소개받은 책 한 권이 큰 여운으로 남았다. 프랑스 작가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 「눈」(neige)이다. 이 소설은 산문시를 읽는 듯 간결했지만, 나에겐 충만한 사유를 남겼다.

일본 북쪽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시인이 되고자하는 주인공 유코의 여정을 다룬 이 소설은 사람의 인연만큼이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관조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 설국에 사는 유코에게 눈(雪)은 특별하다. “비단 종이에 눕히듯” 흘러나오는 그의 시는 오직 눈을 주제로 한다. “눈은 한 편의 시다.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시다.”

시인이 되길 반대하는 아버지와 유코의 대화가 흥미롭다.

아버지는 말한다. “눈은 하얗지. 그래서 존재감이 없다”, “눈은 자연을 얼려서 보존한다. 세상을 감히 우상으로 만들려는 것”, “눈은 계속 변한다. 그러니 믿을 수 없다”, “눈은 미끄럽다. 눈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좋아할까?”, “눈은 물이 된다. 그래서 해빙기에 홍수가 나지.”

유코는 반문한다. “눈은 하얗지요. 그래서 시인 겁니다. 순수한 시예요”, “눈은 자연을 얼려서 보존하지요. 겨울의 가장 섬세한 그림입니다”, “눈은 계속 변하지요. 그래서 눈은 서예입니다. ‘설(雪)’자를 쓰는 만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눈의 표면은 미끄럽지요. 그래서 눈은 춤입니다. 눈 위에서는 누구나 곡예사라고 생각할 겁니다”, “눈은 물이 되지요. 그래서 눈은 음악입니다. 봄이 오면 눈은 강들과 급류들을 하얀 음표들의 교향악으로 바꿉니다.”

이 부자(父子)에게 눈(雪)은 아버지에게는 혹독한 겨울이요, 아들에게는 한편의 서정시(詩)가 된다. 자아와 세계의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을 ‘서정적’이라고 한다면 아들이 섭섭한 아버지에게 눈은 단지 감정의 표출일 것이요, 아들에게는 자아의 투영이 된다.

그러고 보니 일본 풍경을 프랑스 작가가 썼다는 것을 잊은 듯 읽어 내려갔는데 그의 출생이 알프스산맥 기슭 ‘알베르빌’이라니 그 또한 이 소설은 기억을 통한 서정성의 표현일 듯하다.

분명 자연이라는 소재가 불러일으키는 다양한 사유가 있다. 눈뿐만 아니라 비, 바다, 바람, 산, 하늘, 대지를 소재로 한 문학들을 떠올려 본다. 인간의 의도적 손길이 닿지 않는 ‘자연’이라는 대상 안에서 누렸던 누군가의 기억은 때론 문학이 되어 그 감춰진 의미를 세상과 공유한다. 하지만 훗날에도 자연을 향한 낭만은 이어질까?

지난 8월 24일 누군가의 거친 외침이 눈길을 끈다. “오늘 이후 태어난 태평양 연안국의 아이들은 핵 폐수가 섞이기 전 태평양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 이제 예전의 바다가 아니다. 멜빌의 소설 속 고래 「모비딕」이 헤엄치는 그 바다와는 다른, 최소한 어느 누군가에게는 경계와 의심의 바다가 될 것이다. 그 안에 사는 온갖 생명체는 덤이다.

자연을 대하는 태도가 사뭇 달라지는 현실이다. 이제 여름은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바다 수영을 즐기는 모습보단 급변하는 기후를 더욱 체감하는 계절로 다가온다. 또한 눈은 폭설을, 비·바람은 폭풍우를, 하늘은 미세먼지를, 그리고 산과 대지는 개발과 부동산을 연상케 한다.

철학자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이뤄진 인간의 만행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이 얼마나 기만으로 보였을까? 그렇다면 인간의 손길 아래에서 야기된 자연의 위기 앞에서 앞으로도 우리는 서정시를 쓸 수 있을까?

이대로 레오 신부(가톨릭신문 기획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