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에 절대 전해져선 안 될 핵발전… “포기하지 않고 탈핵연대”
핵발전소 안전 약속하던 이들
정작 국민들 생명에는 무관심
방사능 위험 존재한 마을에서
뛰노는 아이들에 죄책감 느껴
고운 모래와 햇빛을 머금고 빛나는 파도가 일렁이는 후쿠시마현 나미에정 우키누마 해변은 연어가 회귀하는 천혜의 어장이었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8㎞가량 떨어져 있는 우키누마는 사고 이후 고기를 낚을 수도, 해수욕을 즐길 수도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됐다. 하지만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된 바다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자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인간이 저지른 악행을 받아들인 바다는 그렇게 고요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일 탈핵 평화순례단은 많은 이야기가 담긴 우키누마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봤다. 인간에 의해 많은 것을 잃었지만, 회복시키는 것 또한 인간이라는 것을 마음 깊이 되새기면서.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 많은 것을 잃은 일본은 ‘사람들’에 의해 또한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이 기술발전의 폐해를 통해 깨달은 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희망으로 가는 길을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 핵발전이 낳은 죽음과 파괴
후쿠시마현 후타바정은 유령도시와 같았다. 이곳에는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 5호기와 6호기가 있다. 사고로 방사성 물질이 땅과 바다로 유출되면서 출입 금지 지역이 된 이곳은 2020년 피난 지시가 해제됐지만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은 거의 없다. 후타바정과 이웃한 나미에정 주민 시가 가쓰야키(75)씨는 “사고 전에는 7000명이 넘었던 주민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돌아온 주민 대부분은 남은 생을 고향에서 보내려는 노인들이다. 거기에 부모님과 함께 살며 생업을 이어가기 위해 돌아온 몇몇 젊은이들이 전부다.
후쿠시마 제1핵발전소에서 30㎞ 떨어져 있는 미나미소마시에 있는 하라마치성당은 발전소에서 가장 가까운 천주교회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사유리유치원에는 사고 이후 돌아온 젊은 부부들의 자녀 90여 명이 다니고 있다. 방사능으로 오염된 나무들을 베고 운동장 흙을 정비했지만, 핵발전소 방향에서 부는 바람과 오염된 비는 피할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일까.
이웃의 갑작스런 병고나 사망 소식을 듣는 것도 이들에게는 일상이었다. 핵발전소 3기가 있는 쓰루가시에서 탈핵운동을 펼치고 있는 오카야마 타쿠미 스님은 “핵발전소에서 일하다 피폭으로 20대 청년이 죽거나 작업복을 세탁했던 인부가 암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은 물론이고 암과 백혈병으로 사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이곳에서 목격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사망 원인을 명확히 밝히지 않고 돈으로 조용히 덮으려는 기업과 정부의 잔인한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핵발전소 건립 지역에는 막대한 교부금이 제공된다. 주민들 목숨을 담보로 지어진 거대한 문화회관과 경기장, 최첨단 시설을 갖춘 구청 등은 작은 시골 마을과 어울리지 않았다. 집 한 채 지을 만큼의 보조금을 제안받은 어부들 사이는 “돈을 받고 핵발전소를 짓자”는 의견과 “핵발전은 위험하니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갈렸다. 그 과정에서 서로를 모함하며 마을 공동체가 파괴된 현장도 핵발전의 가슴 아픈 이면이다.
나미에정 우케도항에서 어업을 했던 시가 가쓰야키씨는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지어질 때 안전하고 사고가 절대 나지 않는다고 홍보하니 대부분 주민들은 돈을 받고 찬성했다”며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저는 도쿄대 교수님을 통해 핵발전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반대 입장을 이야기했고, 그 후 50년 동안 동료 어부들로부터 따돌림과 비난을 받으며 정말 힘들게 살아왔다”고 말했다.
핍박을 받으며 이들이 외롭게 싸우는 이유는 진실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도, 언론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려 노력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가쓰야키씨는 “핵발전소는 건설될 때부터 큰 재산과 생명 피해를 담보로 한다는 것을 사고가 난 후에 절감했다”며 “핵발전은 절대 시작되면 안 되는 죽음의 기술이라는 것을 한국 사람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 연대가 낳은 희망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은 재난 피해가 확산되는 데 용이하다. 한편 그 연결성은 먼 곳의 고통을 나누고 힘을 모으는 평화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핵발전소 사고로 많은 것을 잃은 일본은 연대를 통해 빈자리를 채워가고 있었다.
후쿠이현 오바마시에 있는 묘쓰지(明通寺) 주지 나카지마 데쓰엔 스님은 오랫동안 탈핵운동에 투신했다. 자연과 모든 생명이 공존해야 한다는 불교 사상은 다른 종교의 교리들과 연결됐고, 탈핵운동에 동행하는 원동력이 됐다. 데쓰엔 스님은 “천주교, 개신교는 물론이고 신흥종교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해 일본 내에 핵발전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모든 것이 연결된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생명을 소중히 돌봐야 한다는 것은 각 종교가 가진 공통적 진리”라고 설명했다.
국가가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않자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힘을 모았다. ‘원자력행정을 다시 묻는 사람들 모임’, ‘아오모리현 롯카쇼촌의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를 막는 투쟁’, ‘노후원전 40년 폐로 소송을 지원하는 시민회’, ‘원전 재가동 저지 소송단’ 등 일본 안에는 여러 시민단체가 핵발전 피해를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미야기현의 오나가와 2호기 재가동을 저지하는 소송은 핵발전소 30㎞ 내에 살고 있는 주민 16명이 참여하고 있다. 16명 원고인 외에 소송에 함께하고 있는 이들은 2560명.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탈핵에 공감한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금과 서명으로 이 싸움에 동참하고 있었다. 연대의 힘은 유의미한 결과를 낳기도 했다. 핵발전소 15기가 모여 있는 일본 동해의 와카사만에서 유일하게 핵발전소가 없는 오바마시가 그 상징이다. 데쓰엔 스님은 “핵발전소가 지어지기 시작한 1971년 오바마시는 9개 시민단체가 결합해 반핵 투쟁을 했다”며 “핵발전소를 찬성하는 이들의 마음을 돌리고 개개인의 노력으로 공감대를 확산시킨 결과 과반수 이상이 반대의견에 서명했고, 당시 시장도 주민들 의견에 동참해 핵발전소 건설을 막을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본 사람들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통해 진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했다. 무조건적인 반대가 아닌, 어떤 문제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고자 한 것이다. 후쿠이현 오이정에서 탈핵운동을 하고 있는 미야자키 소신 스님은 “정부나 전력회사는 핵발전이 안전하다는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다”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각자 핵발전 관련 정보를 알아보고 공부해야 하며, 또한 핵발전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람들의 어려움도 생각해야 한다”고 전했다.
일본 원자력 시민회 오시마 겐이치 회장(류코쿠대학 교수)도 “핵발전소 사고 이후 무책임한 사회구조를 바꾸기 위해 시민들이 힘을 모아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생각하게 됐다”며 “약한 자가 더 큰 피해를 받는 핵발전은 윤리적으로 잘못된 발전방식이며 이를 막기 위해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연대해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