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생일 선물로 책 한 권이 도착했다. 교목신부 시절 가르친 제자가 보낸 「죽은 자의 집 청소」라는 책이다. 선물이기에 책을 펼칠 때의 들뜬 기분이 책을 덮을 땐 마음 한구석이 차분해져 갔다. 죽음 이후 남은 육체, 흔적, 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겐 죽음 너머 하느님 나라와는 달리 깊게 생각해보지 못한 죽음의 남겨진 영역이다.
이 책은 특수 청소부 즉, 고독사나 극단적 선택 그리고 범죄현장을 청소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특수 청소업체 대표인 저자의 인터뷰 내용처럼 “이러한 일들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라고 여길 만큼 이 책은 영화나 소설에서 벌어질 법한 일들이 평범한 일상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준다. 책의 일부를 옮겨본다.
“저자는 착화탄에 불을 붙여 생을 마친 여성의 집을 정리하였다. 그런데 라이터와 같은 점화장치가 보이지 않았다. 그 라이터는 분리수거함에 정리가 되어있었다. 그 외에도 자살에 사용되었던 도구들과 심지어 부탄가스의 빨간 노즐 마개마저도 착실하게 분리수거가 되어 있었다. 착화탄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중에 이런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건물 청소부에 따르면 그녀는 명절 선물을 나누는 착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착한 심성을 왜 자기 자신에게 돌려주지 못했을까?” 작가의 안타까운 마음에 이어 나의 생각을 얹어본다. ‘일면식도 없는 이가 뒷감당을 해야 하기에 미안함의 손길을 남긴 건 아닐까?’
특수 청소부는 소외되거나 버려진 그 누군가의 흔적과 자리를 정리함으로써 초췌할 수 있는 죽음의 공간을 마치 남겨진 여백으로 만들어간다. 죽은 자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남은 자들의 행위는 그것이 특수한 청소이든 거룩한 예식이든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결국 영혼의 편한 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그 공간을 채워간다.
새삼 나 또한 죽음 너머의 하느님 품을 동경하듯이 언젠가 떠날 나의 자리도 누군가의 정성된 손길과 마음으로 채워지길 욕심처럼 품어본다. 물론 그 정성에 맞갖은 삶을 살기위한 결심도 함께 말이다.
남은 자의 몫에 관한 생각거리를 덧붙여 본다. 지난달 10·29참사 1주기 주일에 나는 어느 본당에서 홍보미사를 하고 있었다. 오전 미사에 검은 상복을 입은 유가족이 맨 앞에 앉아 있었다. 그 순간 그분들이 10·29 참사 유가족인가 하는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실제로 참사 유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론으로는 세상을 바라보는 복음적 시선을 담은 ‘가톨릭신문’이라 홍보하면서 당일 신문에는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위로의 말을 싣지 않은 것이다. 신문이라는 매체로서 함께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 부끄러움이 앞섰다.
혹자는 이러한 추모의 장을 ‘정치’의 이름으로 선을 긋기도 한다. 사실 멀지않은 때에 일각에서는 ‘정치’라는 치트키를 통해 사회적 죽음의 영역을 혐오로 변질시켰던 기억을 우리 사회는 지니고 있다. 사실 세상 모든 죽음은 언젠가 나의 죽음으로 수렴되기 마련이다. 타인의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결국 우리 각자 그리고 사회의 품격이라고 감히 정의해본다.
책의 본문 한 줄이 유독 인상 깊게 다가온다. “이 집을 치우면서 한 가지 뚜렷하게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당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향한, 이곳에 남은 자들의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