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인문학의 가치 자체가 대수롭잖게 여겨지는 시대다. ‘이제는 문학이 죽었다’는 말도 흔하다. 대학에서조차 ‘문학이 별 쓸모가 없다’고 관련 학과들이 툭툭 잘려 나가고, 문학 장르로서의 ‘시’(詩)를 공부한다는 것은 가망 없는 공부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치부된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문학·문화학과 정은귀(스테파니아·서울 서대문본당) 교수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시를 통과한 느낌과 사유를 나누기 위해 매일 시를 쓰고 번역한다. 현대 미국시 전공자로서 시 읽는 일이 업(業)이기도 하지만, 그 작업 속에서 삶의 가장 중요한 것들과 소중한 존재들에게서 우리가 쉽게 눈을 돌릴 때 ‘시’가 바로 그것을 응시하게 하는 힘을 믿는다.
이번 책은 그가 한국과 외국 시인의 작품 속에서 고른 23편의 시와 그에 덧붙이는 산문이다. ‘나를 기쁘게 하는 색깔’이라는 제목은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의 시 ‘목가’에서 따왔다.
“시의 힘은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들을 다시 특별하게 들여다보게 하고, 그를 통해 우리가 정신없이 살면서 허상을 좇으며 잊고 지나는 것들의 가치를 다시 살려주는 데 있다고 봅니다. 시는 언어 예술 중에서 소금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정 교수는 2014년부터 「경향잡지」에 시를 소개하고 영성을 나누는 글을 쓰고 있다. 번역가이자 시 연구자로서 논문 아닌 다른 형태의 글을 쓰게 된 계기였다. 시적인 것과 영성적인 것의 만남이라 할 수 있는 이 글들은 감옥에서, 또 먼 지방에 있는 이들의 다양한 소감을 접하는 통로가 됐다.
그에게 시는 오늘을 살게 하고, 어려운 순간을 버티게 한다. “경험으로 이를 체득했기에 시가 전하는 힘을 나누고자 했다”는 정 교수는 “시를 읽고 번역하고 나누는 일은 고통받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듬고, 제가 배운 공부와 재능을 조금 더 확장된 방식으로 실천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시의 순간을 읽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시를 통해 자신을 살피고 타인의 안부를 묻고 사회의 아픔과 하느님을 바라본다. 특별히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자리를 살핀다. 김소연 시 ‘학살의 일부 1’에서는 진로 문제로 고민한 제자를 떠올리며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된 개인 문제를, 일상 속 비극에서 학살 조짐을 느낀 시인의 혜안을 짚어낸다. 김종삼 시 ‘어부’를 통해서는 ‘살아온 기적과 살아갈 기적’, 또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는 시어를 나누며 한 생에 필요한 기도와 그 기도가 일으켜 세운 날들에 관해 얘기한다. C.S.루이스의 ‘기도라는 끈’ 등 기도를 주제로 한 시들은 기도의 길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시를 통해 하느님이 선물하신 이 세계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게 하는 그런 힘을 근육처럼 기르면 하루하루 훨씬 더 생기있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저는 시를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기도가 힘이 된다는 걸 정말 믿고 있고, 시는 그런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언어란 것도 정말 믿습니다. 독자들이 이를 느끼시면 그걸로 행복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