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 그리면서 새로운 세상 만나
잊고 있었던 화가의 꿈
저는 충청남도 아산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어요. 동네에 20가구도 채 살지 않는 작은 곳이었어요. 어릴 적엔 진짜 말이 없는 조용한 아이였고, 동네엔 또래 친구 2~3명 밖에 없었어요. 뭐 맨날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는 게 전부였어요. 그리고 그림을 그리는 게 낙이었어요. 맑은 시골 하늘에 피어나는 구름을 그린 것이 기억나는데요, 하늘을 바라보며 구름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궁금해했어요. 그리고 주머니에는 색실을 모아 항상 지니고 다녔어요. 형형색색의 색실 색깔이 너무 예뻤고 저를 설레게 했어요. 그러면서 ‘나는 나중에 커서 화가가 될 거야’라고 했는데, 지금 그렇게 살고 있네요. 그렇게 그림은 저와 굉장히 가까운 존재였어요. 학교에서도 미술 시간만 되면 너무 행복했어요. 내성적인 성격으로 존재감이 없던 제가 드러나는 순간이었거든요.
저는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어머니께서는 제가 상업고등학교에 가길 바라셨죠. ‘아니요’라고 말할 수 없었던 저는 그렇게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고등학교 시절을 생각하면 친구들과 놀러 다닌 것만 기억나요. 필요한 최소한의 자격증만 땄고요. 학교에 가기 싫어서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했어요. 그런데 회사 경리 생활이 너무 힘들었어요. 100원을 찾기 위해 하루 종일 계산해야 할 때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을 가려고 준비했어요.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미술은 자연스럽게 잊게 됐어요. 뭐 그때도 친구들에게 그림을 그려 나눠주기는 했지만요. 그렇게 일반대학에 가려고 준비하는데, 언니가 ‘너 그림 잘 그리잖아’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미대 입시를 준비했어요. 그런데 전기 대학 입시에 실패했어요. 실기시험날 물감의 화학물질 때문에 갑자기 눈이 안 보여 그림을 망쳐버렸어요.
후기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상황이 됐어요. 그런데 이번에 떨어지면 영영 대학교는 못 다닐 것 같았어요. 그래서 충분히 합격하고 전액 장학금으로 갈 수 있는 학교를 지원했어요. 그리고 다행히 원하는 조건으로 대학에 합격했어요.
성화 작가의 길로
대학에서는 열심히 그림 그리고 공부만 했어요. 4년 장학금을 받기 위해 정해진 학점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동기들이 나보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이라고 수군대기도 했어요. 대학 졸업 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위한 미술학원을 열었어요. 아이들을 좋아하고 뭔가 내가 가진 탈렌트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생각했죠. 아이들이 천사로 보였어요.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싶어 유아교육 자격증도 딸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장애인 학교에 있던 수녀님이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달라고 부탁을 하셨어요. 장애인 아이들에게 꿈과 사랑, 희망을 줄 수 있는 그림을요. 그림 규모가 커서 그 학교 창고에서 작업을 했어요. 그림이 완성된 후, 수녀님께서 그 그림으로 카드 1만 장을 찍어서 여기저기 뿌렸어요. 저에게도 한 500장을 주셨어요. 200장 정도는 주변에 돌리고 나머지 300장을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신부님께서 그 카드가 필요하다고 하셔서 제가 갖고 있던 것을 드렸어요. 신부님께서 저에게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미술학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니 ‘당장 그만두라’는 거예요. 하느님께서 탈렌트를 주셨는데 무엇을 하는 거냐고요. 성화를 그리라면서요. 세례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후라, 신부님 말씀을 들어야 할 것 같았어요. 제가 ‘아니요’라고 못하기도 했고요. 당시 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는데, 새로 신부님께서 부임하셨어요. 그런데 저보고 성화를 그리라고 하셨던 그 신부님이었어요. 저보고 대뜸 ‘여기서 만나는군요 작가님’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수원교구 나경환(시몬) 신부님이였어요. 수원가톨릭미술가회 담당이기도 하셨는데, 저보고도 가입하라고 해서 들어갔죠. 그래서 전 신부님께 ‘이제 뭘 그려야 하죠?’라고 물었어요. 성화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신부님은 ‘성경을 읽고 그 내용을 그려보라’고 하시더라고요.
미술가회에 가입하고 전시회에 그림을 내야 하는데, 제가 당시 감명 깊게 읽었던 ‘아일랜드의 시’라고 아이가 매일 감실 앞에서 기도하는 시를 내용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한 사제가 거양성체를 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이 그림이 사람들 사이에 막 퍼지는 거예요. 그게 1999년이었어요. 그렇게 제 그림이 퍼지면서 2002년 ‘서울주보’에 실리게 됐고, 또 프랑스 루르드까지 이어지게 됐어요. 이어서 교황청에까지 제 그림을 보낼 수 있게 돼서 정말 큰 영광이에요.
주님 주신 탈렌트 최선을 다해 쓰고파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후 제가 생각할 수 없었던 세상으로 나아가게 됐어요. 지난 25년 동안 쉼 없이 계속 성모님 성화를 그리고 있어요. 한국의 성모화는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사는 꿈을 꾸면서 행복했던 기억으로 시작됐어요. 한복을 입은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다가 아이들과 함께 있는 성모님을 그리자고 생각했죠. 그러다가 어느 수녀님이 ‘아베 마리아’ 테이프를 주셔서 들었는데, 뭔가 모르게 제가 붕 뜨고 설레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후로 한 2년 정도 성모님의 꿈도 꿨어요.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우리네 성모님을 그리게 됐어요.
지금까지도 제가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이라고 생각해요. 제 힘으로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거예요.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건강도 주셨고요. 그리고 주변에서 도움을 주시는 모든 분들이 하느님께서 보내주시는 천사처럼 느껴져요.
그림 그리는 일은 제 평생의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느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주님의 뜻에 따라 쓸 수 있도록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다만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제 그림으로 조그마한 경당을 하나 꾸며보고 싶어요. 그리고 이탈리아 피렌체 성 마르코 수도원 방마다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이 있는 것처럼 어느 수도원이나 피정의 집 방에 제 그림이 한 점씩 두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 심순화(가타리나) 작가는
1961년 충청남도 아산에서 태어났다. 1999년부터 성화 전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프랑스 루르드 성지를 비롯해 교황청 복음화부와 성직자부, 당고개 순교성지 등 국내외에 다양한 작품이 소장돼 있다. 최근에는 교황청 바티칸 정원에 ‘평화의 모후’를 봉헌하기도 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