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내가 만난 김수환 추기경] 막달레나 공동체 이옥정 대표

정리 주정아 기자
입력일 2009-03-17 수정일 2009-03-17 발행일 2009-03-22 제 2640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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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처럼 따스한 품을 열어주신 분”
쉼터 오시면 몇 시간 씩 대화 나눠
그분 손길·말씀은 큰 위로와 격려
1988년 정월대보름, 쉼터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이 쉼터 여성들과 둘러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옥정 대표는 보통 사람들은 잘 만나주지도 않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한결같이 보인 김수환 추기경의 따스함은 큰 위로가 됐다고 말한다.
김 추기경이 1998년 성녀 마리아막달레나 축일을 맞아 쉼터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수많은 편견과 질곡의 삶 속에서 빠져나오기는 정말 쉽잖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고, 자존감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성매매 피해여성을 위한 쉼터와 상담소, 지원센터 등으로 구성된 ‘막달레나 공동체’에서는 성매매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성들이 몸을 가누고 있다.

교회 안에서조차 따가운 시선을 견뎌야 하는 이들에게 봄기운과 같이 따스한 품을 열어준 이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막달레나 공동체 이옥정(콘세크라타·61) 대표는 김 추기경은 성매매 피해 여성들이 자신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소중한 존재임을, ‘나도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갖게 해준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김 추기경은 막달레나의 집 개원 20주년 축하의 글에서 “저는 마음속으로는 막달레나의 집을 자주 생각하면서도 실천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미안합니다”라는 인사를 남겼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막달레나의 집을 찾는 날엔 그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 일부러 다른 일정을 잡지 않았다고 말했다. “저는 영원히, 언제나 어린이 같은 우리 막달레나의 집 자매들의 친구”라고 고백했다.

정월대보름날의 다정한 손님

김수환 추기경님과 처음 마주한 것은 1988년 정월대보름날이었다. ‘막달레나의 집(성매매 피해 여성 쉼터, 이후 쉼터)’에서 둥그런 밥상을 마주하고 앉은 그분의 모습은 큰아버지처럼, 옆집 아저씨처럼 편안하고 푸근했다.

자그마한 집을 쉼터 삼아 모여든 성매매 피해 여성들은 명절이면 특히 더 쓸쓸해했고, 나는 이들의 모습에 마음 아팠다. 세배 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어드는 정월대보름에는 추기경님이 혹시 오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초청카드를 보냈었다. 저희와 오곡밥 한 그릇 드시지 않겠느냐고.

정월대보름날, 추기경님은 로만칼라도 없이 후줄근한 밤색 점퍼를 입고 오셨다. 낡은 바지는 구김이 너무 심해 시선이 자꾸 갈 정도였다. 추기경님께서 오신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이나 인근 본당에 알리면, 너무 번잡스럽고 쉼터 여성들이 다른 신자들에게 밀려 소외될까 봐 미사도 마련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미리 드렸었다. 그래도 그렇게 조용히 그런 모습으로 오실 줄이야. 그런데 한 여성이 냉큼 ‘추기경님, 바지 좀 다려 입으세요’라고 말했다. ‘이를 어쩌나’ 난감해 하던 내 앞에서 추기경님께서는 허허 웃으시며 ‘그래 그래’라고만 하셨다.

쉼터 여성들은 추기경님에 대해 잘 몰랐다. 아는 이들도 그저 가톨릭교회에서 좀 높은 분 정도로 생각했다. 그날 추기경님은 여성들의 세배를 받고 4시간이 넘도록 담소를 나누셨다. 추기경님의 입장에서는 수준에 안 맞는 이야기들이 이어졌지만, 무척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추기경님께 세뱃돈을 받은 이들이 막걸리를 사와 돌렸는데, 추기경님은 여전히 여러 사람들과 둘러앉아 이런저런 칭얼거림을 다 받아주셨다. 그러다 한 여성이 술이 취해 추기경님 무릎에 기대 눕더니 담배를 빼어 무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웃고 난리가 났었는데, 추기경님은 옆의 사람에게 라이터를 달라더니 그 여성에게 불을 붙여주시는게 아닌가. 넋두리에 주정까지 하는 이들에게 ‘술 말고 안주도 먹어야지’하면서 안주도 집어 건네주시고, 여성들이 이것저것 먹기를 권하며 입에 넣어드리는 것도 다 받아 잡수시기도 했다. 너그럽게 조카를 대하는 큰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다음 해에도 추기경님께는 ‘아저씨’랬다가 ‘신부님’이랬다가 ‘추기경님’이랬다가 호칭조차 헷갈리는 여성들과 어울려 늦도록 윷놀이를 즐기셨다. 이기려고 경쟁하는 모습도 꼭 친구 같았다.

성매매 피해 여성들의 큰아버지

한 번 찾아오면 몇 시간이고 함께 계셔주시는 추기경님께 너무 죄송스러워 다음 해인 1990년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음력 정월대보름이 얼마 지나지 않은 3월, 입소자 중 한 명이 신부전증으로 선종했다. 추기경님께서 많은 격려를 주셨던 이였기에 선종 소식만 전해드렸다. 추기경님께선 곧바로 조화와 손수 쓰신 메시지를 영안실로 보내주셨다. 그것만으로도 성매매 여성들에겐 너무나 큰 위로였다.

그런데 이튿날, 추기경님께서 영안실을 찾아주셨다. 바쁜 일정 중에 잠시 짬을 낸 것이었다. 당시 성매매 피해 여성은 선종하면 화장하거나 시립 공원묘지 등에 묘비도 없이 묻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찾아주는 가족도 거의 없었다. 게다가 성매매 업주들은 외출을 허락하지 않았고, 성매매 여성들도 초상집은 재수 없다며 찾지 않았었다.

하지만 김 추기경님이 성매매 피해 여성의 장례식장을 찾은 순간부터 성매매 여성들이 변했다. 추기경님이 오셨는데 안 가볼 수 없다며 너도나도 모여들어, 가족 한 명 없는 장례식이었지만 장지까지 이동한 버스만 두 대가 될 정도였다. 당시엔 업주들조차 외출을 말리지 않았었다. 추기경님을 한 번도 못 본 이들도 추기경님이 자신의 집에 오신 것처럼 자랑하고 다녔고, ‘나도 죽으면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말하곤 했다.

김 추기경님은 1991년에는 재활 훈련 후 가게를 낸 여성에게 100만원을 건네 주셨다. 내가 지나가는 말처럼 자립을 준비 중인 사람이라고 소개했는데, 추기경님은 사소한 말조차 놓치지 않고 기억하시곤 쌈짓돈을 보태주신 것이었다. 이후에도 김추기경님은 꾸준히 막달레나의 집을 물심양면 후원해주셨다.

유명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고, 보통 사람들은 잘 만나주지도 않는 성매매 여성들에게 한결같이 보여주신 따스함은 정말 큰 위로였다. 우리에게 찾아오신다고 해서 언론에 보도되는 것도 아니었고, 인근 본당에조차 알리지 못하는데, 늘 흔쾌히 비서신부님만 동행해 조용히 찾아오셨다. 그만큼 우리를 배려해주신 모습이 너무 감사했다. 해마다 초청장을 보내는 나 자신이 나도 이해가 안 되고 염치없을 정도였지만, 추기경님은 늘 연락해야 하는 가족과 같이 느낌이었다.

2002년에는 경기도 강화에 중년 여성들의 재활을 위한 집을 열었다. 추기경님도 기꺼이 오셔서 우리를 축하해주셨는데, 알고 보니 그 전날 불면증으로 밤을 새우셔서 극도로 힘겨운 컨디션으로 와 주신 것이었다. “왜 그렇게 무리를 하시냐”고 걱정스레 여쭙자 하신 대답이 빙긋이 웃으시면서 “내가 안 오면 콘세크라타 삐쳐서 울까봐 그랬지”라고 대답하셨다. 나는 코끝이 찡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추기경님께서 우리집을 다녀가시면서 성매매 여성들도 차츰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추기경님의 사랑이 꾸며진 것이 아님을 느끼면서부터 쉼터 여성들은 교리도 받기 시작했다. 물론 그런 결과는 막달레나의 집 운영을 위해 많은 이들이 애써온 덕분이기도 했지만 추기경님의 손길 한 번, 말 한 마디가 큰 씨앗이 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더불어 살라는 메시지 밥상으로 전해줘

추기경님께서는 많은 선물을 주셨지만, 유독 밥상을 받은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

어느 날 추기경님 비서실에서 밥상을 가져가라는 전화가 왔다. ‘뜬금없이 웬 밥상?’. 의아해하며 찾아갔더니 추기경님께서 지인에게 상을 선물 받았는데, 자신은 사용하는 것이 있으니 우리들에게 주라고 하셨단다. 자개로 장식된 아주 근사한 것이었다.

‘추기경님 손길을 바라는 수많은 이들이 있는데 왜 우리에게 밥상을 주셨을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이 있었다. 추기경님께서 우리집에 오실 때면 우린 늘 함께 밥을 먹고 싶어 온갖 상을 다 꺼내 한 방에 펼치곤 했다. 그중 하나가 다리 하나가 빠졌는데, 우리 딴엔 예쁘게 포장한 벽돌로 받쳐서 사용했다. ‘세상에 그걸 보셨구나’. 구구절절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그 마음 씀씀이에 고마움이 북받쳤다.

김 추기경님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 거짓말처럼 나는 추기경님과 찍은 사진이며 보내주신 각종 카드 등을 정리했었다. 손목이 불편해 아픈 가운데에서도 굳이 손으로 써서 보내준 메시지도 하나하나 읽어보는 시간이었다.

“영옥, 은영, 은주, 은경, 막달레나 막내 소영, 숙현…. 한 분 한 분 주님의 사랑 속에 몸도 마음도 평안하시길 거듭 기도드립니다.”

카드에 한 사람 한 사람 이름까지 적어주신 배려가 우리 곁에 남아있었다.

남은 우리끼리도 나눌 수 있는 사랑과 추억을 남겨주셔서 김 추기경님께 더욱 감사드린다. ‘옜다’. 늘 세뱃돈을 넉넉히 준비해 오셔서, 남은 돈을 대표인 나에게 전혀 특별하지 않게 쥐어주며 건네시던 그 목소리가 귓전에 생생하다.

정리 주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