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성월 특집] 박해 시기 어린이 신자의 신앙
선교사 10명을 포함한 한국교회 103위 성인은 모두 순교자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을 내놓고 목숨을 바친 것이다. 이들 중 유대철(베드로) 성인의 나이는 당시 13세였다. 성인은 옥에 갇힌 아버지 유진길(아우구스티노) 성인과 여러 순교자가 보여준 영웅적인 모범에 감복해서 어린 나이에도 순교를 각오했고 스스로 관헌을 찾아가 결국 순교의 면류관을 썼다.
조선 시대 평신도들의 자발적 신앙 노력으로 시작된 한국천주교회는 시작과 함께 혹독한 박해를 견뎌냈다. 이 과정에서 순교한 이들은 1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부지기수가 이름도 없이 스러졌다. 기록에 남은 이는 2000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고초와 형벌을 이겨내며 하느님을 드러낸 신앙 선조 중에는 유대철 성인처럼 죽음 앞에서도 굳건한 믿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지키려 애쓴 어린이나 청소년들의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믿고 말고요.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
전 세계 성인(聖人) 관련 사이트(CatholicSaints.Info)의 ‘어린 성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유대철 성인은 어려서부터 천주교에 입교해 부친을 본받아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다. 어머니, 누나의 반대와 괴롭힘 등 가정의 박해 속에서도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았고 지극한 효성을 보이며 그들의 회개를 기도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순교의 열망을 지니게 된 성인은 자수했지만 배교를 강요받았다. 힘든 형벌과 고문에도 신앙을 굽히지 않자 한 형리가 구리로 된 담뱃대로 허벅지 살을 뜯어내며 “이래도 천주교를 믿겠느냐?”고 했다. 이에 성인은 “믿고 말고요. 그렇게 한다고 제가 하느님을 버릴 줄 아세요”라고 답했다.
화가 난 형리가 불에 달궈진 숯덩이를 입에 넣으려 하자, “자요”라며 입을 크게 벌려 형리들을 놀라게 했다. 총 14차례의 신문과 고문, 100여 대의 매, 40대의 치도곤을 맞아 피투성이가 됐음에도 성인은 평온을 잃지 않고 기쁜 표정이었다고 한다. 형리들은 배교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해 몰래 목을 졸라 죽였다.
이 바르바라 성녀도 기해박해 때 15세 어린 나이로 순교했다. 독실한 교우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두 이모 밑에서 자랐던 성녀는 체포돼 ‘어린 것이 요물이다'하여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다.
끝까지 배교하지 않아 포도청에서 형조로, 다시 포도청으로 송환되며 훨씬 가혹한 고문이 가해졌어도 꿋꿋이 참아냈다. 성녀는 그런 가운데서도 함께 갇힌 어린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다가 기갈과 염병, 고문의 여독으로 옥사했다.
“내 목을 자른다면 나는 천주께로 가겠죠”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에서도 당시 어린이들의 어른 못지않은 굳은 신앙심을 들여다볼 수 있다. 리델 신부(1830-1884)는 안드레아라는 신자 집에 피신 중 그의 딸 12살 안나와 동생들이 나눈 대화를 듣고 이를 편지에서 언급했다. 리델 신부가 다블뤼 주교의 순교 소식을 안드레아 내외와 나눴고, 이를 엿들은 어린 자녀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한 것을 이번에는 리델 신부가 들은 것이다.
안나가 “우리도 붙잡아다가 ‘천주를 버려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지를 자르겠다’고 말할 거야.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자, 동생은 “난 이렇게 말할 거야.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나도 아빠처럼 할 거고 천주를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내 목을 자른다면 나는 천주께로 가겠죠.’” 안나는 두 남동생을 껴안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다 함께 치명하는 거야. 그래서 아빠랑 엄마랑 신부님하고 같이 천국에 갈 거야.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천주님께 기도를 잘해야 해'. 그 사람들이 우리를 아프게 할 거거든. 머리털이며 이도 뽑고, 팔을 빼고, 커다란 몽둥이로 때릴 테니까.”(1866년 12월 23일자 리델 신부가 가족들에게 보낸 서한) 안나와 두 동생은 이미 순교를 각오한 것이다.
1864년 11월 15일 베르뇌 주교(1814~1866)가 성영회장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천주의 수난에 함께 하지 못해 슬퍼하는 12살 소녀 사연이 나온다. 고해성사를 보러왔던 이 소녀는 아버지로부터 ‘하느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 죄를 짓느니 차라리 천 번이라도 죽겠다’고 하자 몽둥이로 심하게 두들겨 맞았다.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이웃의 비신자 여인들이 와서 아버지에게 ‘더 이상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 매질은 중지됐다. 하지만 소녀는 고통에 비명을 참지 못했던 것과 비신자 여인들이 아버지에게 한 약속에 자신이 항의하지 못했던 것에 마음 아파했다.
여기서 소녀를 힘들게 했던 것은 매를 맞는 아픔이 아니라, 자신을 도와준 여인들이 고마우면서도 ‘천주를 버릴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한 나약함이었다. 천주에 대한 소녀의 태도는 당시 조선 신자들의 평범한 신앙을 대변한다.
위앵 신부(1836~1866)는 1865년 쓴 편지에서, 언어를 배우며 지내던 집의 주인 딸 14살 데레사 이야기를 한다. 데레사는 위앵 신부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꽃들을 심어 놓았다. 여기서 어린 소녀가 보기에도 안쓰러웠던 선교사의 삶이 그려진다. 들꽃을 꺾어 신부님만을 위한 비밀 정원을 만들었던 소녀의 정성은 목자의 지친 마음을 잠시나마 위로해 주었을 것이다. 위앵 신부는 순교의 피로 신자들 사랑에 보답했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동생들이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 복자가 순교하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킨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때 14세였던 둘째 아들 의정(야고보)은 감옥에 가끔 드나들며 어머니가 형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는 것을 목격했다. ‘형장에 따라오지 말라’는 얘기를 들은 그는 옥에서 작별 인사를 했고 ‘하느님 계명을 부지런히 지키고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의정과 어린 동생들이 동냥으로 구한 돈 몇 푼과 떡을 망나니에게 내밀며 “우리 어머니가 아프지 않게 단칼에 하늘나라로 가게 해주세요”라고 한 일화는 유명하다.
상속되는 신앙
「근세조선정감」에는 “천주교인들은 장을 맞고 피부가 낭자하게 터지는데도 ‘내 몸에서 혈화(血花)가 나니 장차 천당에 오르겠다’고 환호하고, 어린아이들도 부모를 따라 천당에 오르기를 원했다”고 기록돼 있다. 유대철 성인이 아버지 유진길 성인의 신앙을 보고 순교를 자청했던 것처럼, 리델 신부가 피난했던 집 안나와 동생들이 ‘아빠처럼 천주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던 말 같이 박해 시기 어린이들의 신앙은 열심했던 부모들에게서 이어진 것이었다.
대전교구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성태(요셉) 신부는 “부모의 신앙은 자녀에게 상속되는 것이고, 자식의 신앙 됨됨이는 부모의 모습이기도 하다”며 “신앙은 그렇게 본보기가 되는 것임을, 또 유산처럼 전수되는 신앙의 속성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고 전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