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대희년 과거사 반성 문건 발표하고 일제강점기 소극적 자세 고백 ‘친일’ 지목된 노기남 대주교, 역사·신학적 재평가 진행중
2000년 대희년을 맞은 가톨릭교회는 제삼천년기를 열면서 하느님 자녀들의 잘못을 하느님과 인류 앞에 고백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2000년 3월 12일 십자군 전쟁을 비롯해 교회가 2000년 동안 잘못한 일들에 대해 용서를 청했습니다. 한국교회도 12월 3일 한국교회의 과거사 반성 문건인 「쇄신과 화해」를 발표했습니다. 총 7개 항의 고백 중 하나가 바로 일제 통치 아래에서 민족의 고통을 외면한 죄였습니다. 「쇄신과 화해」는 두 번째 항목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열강의 침략과 일제의 식민 통치로 민족이 고통을 당하던 시기에 교회의 안녕을 보장받고자 정교분리를 이유로 민족 독립에 앞장서는 신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는 제재하기도 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가톨릭신문(2000년 12월 3일)은 1면 톱기사와 19면 특집면에서 이 고백을 게재하고 “과거사 반성은 매우 정밀한 역사적 판단과 신학적 판단이 필요하다”면서도 “과거의 잘못을 참회하고 정화하지 않고는 새로운 천년기의 문턱을 넘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당초 이 문건은 병인양요, 일제강점시대 독립운동 외면과 제재, 신사참배 허용 등 구체적인 사안들을 직접 언급하려 했으나 최종 단계에서는 역사적 및 신학적 평가의 어려움 때문이었는지 역사적 사건들이 구체적으로 언명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19년 뒤인 2019년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서는 더 구체적인 반성과 성찰이 이뤄집니다. 당시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히지노) 대주교는 ‘3·1운동 정신의 완성은 참 평화’라는 제목으로 100주년 기념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3·1운동 100주년에 즈음해 전국에서 거행된 기념행사 소식을 전하면서 담화의 내용을 소상히 소개했습니다.
“김 대주교는 담화를 통해 100년 전 많은 종교인이 독립운동에 나섰지만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천주교회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했음을 반성했다. 김 대주교는 ‘외국 선교사들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 지도부는 교회를 보존하고 신자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정교분리 정책을 내세워 신자들의 독립운동 참여를 금지했다’면서 ‘나중에는 신자들에게 일제의 침략 전쟁에 참여할 것과 신사참배를 권고하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민족의 고통과 아픔을 외면하고 저버린 잘못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성찰하며 반성한다’고 말했다.”(가톨릭신문 2019년 2월 24일자 1면 중에서)
우리 민족이 일제 치하에서 국권을 상실하고 억압당했지만 교회는 이러한 민족적 시련과 괴리된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 많은 역사학자들의 평가입니다. 비록 그것이 피로써 지킨 교회가 또다시 피 흘려서는 안된다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부끄러운 역사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당시 교회 지도층은 뮈텔 대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어쩌면 일본은 단지 또 하나의 정권으로 여겨졌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오랜 박해를 받았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서 새 정권인 일제와 정교분리적인 관계를 맺으려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뮈텔 주교 일기」(1911년 6월 16일자)에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는 여기에서 “천주교는 정치 문제에 무관심하고 항상 일본을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고 있다”며 “이것은 나와 우리 모든 신부들의 공통된 생각이고 또한 이렇게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당시 지도층의 인식은 참담할 지경이었습니다. 뮈텔 대주교는 안중근(토마스)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분노했고 죽음을 앞둔 안 의사에게 성사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이를 어기고 성사를 준 빌렘 신부에게 성사 집행 정지령을 내리기까지 했습니다. 안 의사는 살인자로 단죄됐습니다.
그 단죄가 취소되고 안 의사가 1993년 8월 21일 복권되기까지는 무려 84년이 필요했습니다. 가톨릭신문은 그날 오후 6시 서울 혜화동 가톨릭교리신학원 성당에서 봉헌된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 소식을 이렇게 전했습니다.
“일제 수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암살, 일제 치하의 제도교회에 의해 단죄됐던 안중근(토마스) 의사가 84년 만에 김수환 추기경의 공개 사과로 의거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 제도교회를 대표하는 현직 교구장이 공식 집전한 첫 번째 추모 미사로 일제 치하의 한국 가톨릭교회가 범한 과오를 사과하고 바로 잡은 것은 한국 현대교회사의 일대 전환점으로 평가됐다.”(가톨릭신문 1993년 8월 29일자 1면 중에서)
김 추기경은 심포지엄에 앞서 제도교회의 친일 행각에 대해 “상상했던 이상의 일들이 저질러졌다”며 “한국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과오를 당시 제도교회가 범했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습니다.
일제 아래에서 교회의 친일 행위와 관련해 비판받는 또 한 가지 사례가 최초의 한국인 주교인 노기남(바오로) 대주교입니다.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노 대주교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단정하고 이를 서울대교구에 통보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대교구는 “노 대주교의 일제에 대한 협력은 개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보다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희생으로, 다른 친일 행위자와 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사실 선교사들이 맡고 있던 한국교회의 교구장 자리에 일본인 성직자를 임명하려고 했던 일제의 뜻에 반해, 최초의 한국인 성직자가 주교로 임명된 사실 자체가 식민 통치에 대한 저항의 일환이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최초의 한국인 주교가 탄생한 경성대목구가 여러 가지 불이익을 받았던 점이나 대구대목구와 광주지목구에는 일본인 성직자가 각각 대목구장과 지목구장에 임명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후 노기남 대주교의 행적은 일제에 대한 협력과 민족의 자주성과 독립을 옹호하는 모습, 이 두 가지 모두로 해석될 수 있는 모습들이 교차됩니다. 역사와 시대의 제한성 안에서, 지금의 획일적인 잣대로만 측량하고 평가하기만은 어려운 상황들이 많습니다. 그에 대한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평가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역사적인 오점과 과오들이 점철돼 있다고 할지라도 한국 천주교회는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과 민족의 역사가 함께 엮여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는 사실입니다. 민족의 운명, 민족적 고통과 고난 속에서 신앙과 교회는 국가와 민족과 유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깨달음은 장차 독재정권과의 투쟁, 가난한 이들 곁에 서서 인권과 정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에 투신하는 바탕을 이룹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