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3)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과 첫 지역 공의회

박영호
입력일 2025-04-09 08:53:50 수정일 2025-04-09 08:53:50 발행일 2025-04-13 제 343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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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핍박 이겨낸 조선교회 100년…올바른 신앙 실천 정신 독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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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선전문’이 실린 천주교회보 1931년 10월 1일자 1면

“三천리강산 이땋에 진리의 빛 천주의 복음이 전한지 一백四十八년이오 조선교구가 설정된지 백년이다. 우리는 이날을 긔념하고 축하하며 천주의 진리를 四해에 외치노니 모든이는 다 같이 즐겨용약하라. … 거금 백년전에 비로소 로마 교황청의 재가로써 정식으로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가 이땋에 권교할 책임을 맡앗으니 그때의 신자수효는 六천명이엿다.”

‘천주교회보’가 창간된지 4년 반이 지난 1931년, 10월 1일자 회보 1면에는 ‘축(祝)조선천주교구설정백주년기념’이라는 제목 아래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이른바 ‘선전문’(宣傳文)이 실렸습니다. 이 글은 조선 땅에 복음이 전해진 뒤 처음으로 교구가 설정된지 1백주년을 맞은 기쁨을 담고 있습니다.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하면서 시작된 조선교회는 1790년대초 이래 북경교구장 주교의 개인적인 지도와 보호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794년 조선에 들어왔지만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함으로써 이후 30여 년 동안 조선교회는 목자 없는 양 떼로 지냈습니다.

신앙 선조들은 거듭된 박해 속에서도 목숨을 바쳐가며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던 중 레오 12세 교황이 1828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조선의 선교 사업을 맡겼고, 3년 뒤인 1831년 9월 9일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조선에 독립적인 교구, 즉 조선대목구를 설정하고 초대 대목구장에 브뤼기에르 주교를 임명했습니다.

‘선전문’은 혹독한 고난 속에서도 복음의 씨앗을 싹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은 조선교회의 지난 100년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오호라 악마의 작난이 심하여 신자의 자유와 재산은 여지없이 짓밟히고 악마의 칼날에 생명은 아츰 이슬같이 살아젓으니 긔해 병오 병인년의 三대학살시에 순교의거륵한 피를 흘린자 무려 수만명이엿다. 그들의 철석같이 굳은 신앙 불꽃같이 열열한 정신은 조곰도 굴하지 않고 선혈로 이땋을 세례하엿다. 정의는 필승이라 우리의 조상이 목숨을 바처 전해준 복음의 씨는 一八八二년 이후 비로소 신앙 자유를 얻어 봄바람을 마지하엿으니 그때의 신자수효는 一만二천명이엿다. 그후 五十五년을 지난 오늘에 十二만의 신자를 얻엇고 교구는 경성 대구 원산 평양 연길의 다섯으로 난호엿으며 모든 시설과 사업이 날로 륭창하여가고 있다.”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천주교회보, 기념 선전문 게재
날로 커져가는 교세 바탕으로 
신앙 선조 거룩한 정신 받드는
새로운 시대 교회의 자세 강조

기해박해와 병오박해, 그리고 병인박해로 수만 명의 순교자가 배출될 정도로 혹독했던 고난의 시기를 지나온 조선교회는 100년 만에 6000명이었던 신자 수가 12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신자 수가 늘어나고 교세가 커져감에 따라 조선대목구는 서울대목구 외에 대구대목구(1911)·원산대목구(1920)·평양지목구(1927)·연길지목구(1928)로 나뉘었습니다.

천주교회보는 ‘선전문’이 실린 같은 날자의 회보 4면에서 1931년도 조선교구의 교세 통계(1930년 5월 1일부터 1931년 5월 1일까지)를 도표로 만들어 전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서울, 대구, 원산, 평양, 연길 등 5개 교구에 주교가 6명, 외국인 신부 95명, 조선인 신부 75명, 외국인 수사 29명, 조선인 수사 7명, 외국인 수녀 37명, 조선인 수녀 166명이 있었습니다. 성당이 279개에 공소가 1351개였고, 신자 총수는 11만6694명, 예비신자도 무려 7659명에 달했습니다. 냉담 교우의 수는 3168명이었습니다.

‘선전문’은 나아가 100주년을 맞은 조선교회가 “그리스도의 정신 카톨릭 정신이야말로 사람으로써 반듯이 가질바 정신이오 행할바 바른 길”임을 일깨웁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 깃븜이 영광이 다만 우리들 천주교인에게만 국한한 깃븜과 영광이 아닌줄 알자”며 “참되히 살아가기 위하야 바른 길을 찾아 나아오라”고 권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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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26일 서울에서 열린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 축하식.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이러한 다짐을 독려하듯이 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모임과 행사들이 마련됐고, 새로운 시대로 힘차게 나아갈 교회의 자세를 가다듬는 작업들이 이어졌습니다. 천주교회보는 특히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세상으로 적극 나아갈 것을 권고했습니다.

11월 1일자 천주교회보는 1면에서 ‘가톨릭운동의 철저한 실행’을 촉구하면서 “우리 교우 전체가 사회적으로 카톨릭운동을 철저히 해보기로 귀약하고 실행하자”며 “三천리 강토를 천주의 포도원으로 만들고 二천만 민중을 천주의 복된 자녀를 만들어야만 될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이처럼 박해를 딛고 일어선 교회의 성장과 발전의 맥락에서 조선교회는 이제 교구 설정 100주년을 지내며 새로운 도약을 위한 힘찬 논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조선교회는 그해 9월 처음으로 지역공의회를 개최합니다. 5개 교구의 교회 지도자들은 3월 준비회의를 열었고 때마침 일본 주재 교황사절로 임명된 에드워드 무니 대주교가 조선지역 공의회의 소임을 맡습니다.

교황사절이 주재하고 의결권이 있는 주교들이 참석한 이 첫 지역 공의회는 9월 13일 장엄미사를 시작으로, 이튿날부터 26일까지 12일 동안 서울 주교관에서 열렸습니다. 여기에는 무니 대주교를 비롯해 전국 5개 교구 주교와 교구장 감목대리, 부감목, 전문위원 성직자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첫 지역공의회의 결과로, 이듬해 6월 교령이 공포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국교회의 중요한 지침과 사목적 방향들이 정해졌습니다. 교령에 따라, 새 교리서 「천주교요리문답」이 간행(1934)됐고, 회장 제도와 판공성사 등의 제도들이 규정되고 정비됐습니다. 또 성사에 대한 규정들과 사제들이 지켜야 하는 규율들, 신심회 등에 대한 규정들이 다뤄졌습니다. 교령을 바탕으로 공동지도서(현 사목지침서)도 간행됐습니다.

이처럼 조선교회는 일제 강점기 억압 속에서도 눈에 띄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구 설정 100주년에 즈음해 새로운 시대를 향한 발걸음을 재촉했던 조선교회는 겨레와 민족과 얼마나 함께하려고 노력했던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마주서게 됩니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시대적 한계에 갇혔었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민족의 고통에 온전히 함께하지 못했다는 평가는 분명히 뼈아픈 성찰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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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공의회 마지막 날 장엄미사를 마치고 명동대성당에서 나오고 있는 주교단 행렬. 한국교회 공의회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해 1931년 9월 13일부터 26일까지 서울 명동대성당에서 개최된 주교회의로, 전국에서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는 새 교리서 편찬을 가결하는 등 한국교회 발전을 위한 협의가 이뤄졌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