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가톨릭신문으로 보는 한국교회 100년] (2) 가톨릭 언론의 태동, ‘천주교회보’ 창간

박영호
입력일 2025-03-31 13:35:20 수정일 2025-03-31 13:35:20 발행일 2025-04-06 제 3436호 12면
스크랩아이콘
인쇄아이콘
 
            

“本報는 左의 세 가지 要求에 應하야 出生하였으니 一은 南方敎區내의 消息報道요 二는 敎會發展에 대한 意見交換이요 三은 步調一致 이것이외다.”(天主敎會報 1927년 4월1일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中에서)
1927년 4월 1일, 대구의 남방 천주공교 청년회가 한국 가톨릭 언론의 효시인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를 창간했습니다. 아래로는 22세, 위로는 41세까지 5명의 젊은 평신도들이 펴낸 천주교회보는 그 후 ‘가톨릭신문’으로 불리우며 민족과 교회와 함께하며 2027년 창간 100주년을 맞게 됩니다. 한국천주교회가 진리에 목마르고 백성들의 고통에 아파하던 청년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시작됐듯, 가톨릭신문 역시 복음 선포의 열정으로 가득했던 청년들에 의해 시작됐습니다.

Second alt text
‘천주교회보’는 창간사에서 소식 보도, 의견 교환, 보조 일치를 사시로 내세웠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너무도 오래 묵묵했다!’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회보’는 창간호에서 신앙의 열정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낫다! 낫다! 적고 적은 이 내 몸이 고요한 첫 새벽에 그윽히 울리는 종소리처럼 우렁차게 소리치고 나왔다/너무도 오래 묵묵했다. 눈이 있어도 못 보았다. 귀가 있어도 못 들었고 입이 있어도 말 못 했고 손이 있어도 못 적었다/알고 싶다. 교회 사정 전하고 싶다. 이리저리 진리로써 인간불순 복멸하여 승전고를 울려보자/우리의 이마에는 십자가를 새겼으며, 발사마 향으로 목욕하고 신덕으로 무기 삼아 예수 말씀 앞세우니 위세 당당 이내로세/눈 있는 자 어서 보라. 입 있거던 말할지며 용맹커던 도전하라. 모든 사배 만고의 진리에 항복하리라.”

젊은 평신도들은 결연하게 시대의 아픔을 극복하고 복음을 선포하려는 열정으로 가득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듣지 못하며, 입으로는 말 못 하고, 손으로는 글을 쓰지 못했던 답답한 마음과 무력한 상황을 타파하리라는 결기를 창간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정을 널리 전하고 복음의 진리를 바탕으로 정의를 실현하며 십자가와 말씀을 높이 세워 굳건한 믿음과 용맹한 태도로 진리를 전하리라는 젊은이들의 풍모는 위풍당당했습니다.

창간사에 나타난 ‘천주교회보’의 창간 이념은 소식 보도, 의견 교환, 보조 일치 등 3가지였는데 그 중 ‘의견교환’은 1949년 ‘조국성화’로 바뀌었습니다.

창간의 역사적 배경

‘천주교회보’가 창간되던 때는 일제의 억압적 통치가 형식적으로나마 완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일제 무단 통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선언한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문화정책으로 식민 통치의 방향을 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해 9월부터 일제는 민간 신문을 인가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됐습니다. 종교신문의 경우, 정치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그 이전에도 발행이 가능해 1911년 감리교에서 월 2회 회보가 발행됐었고 천주교에서도 경향잡지가 발행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 안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일본 천주교회 정기간행물의 독자들이 있었습니다. 1923년에 창간된, 일본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가톨릭 타임스가 대표적인데, 한국의 ‘천주교회보’ 창간 역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천주교회보’ 창간 당시인 1927년 4월 우리나라 총인구는 약 1900만 명이고 가톨릭신자는 약 11만 명에 불과했습니다. 민족 전체의 문맹률이 80%에 달했고, 미미한 교세와 신자 수 등을 고려할 때 회보 발간의 결단은 만용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천주교회보’ 창간 후 3개월이 지난 7월에는 서울 청년회연합회도 타블로이드판 4면으로 ‘별’을 창간했습니다.

Second alt text
가톨릭신문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고 빠르게 한국교회와 사회에 전해주었다. 1962년 10월 11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미사. CNS

역사적 의미와 중요성

가톨릭신문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창간 이후 지금까지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교회와 그 구성원들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일제시대로부터 이어지는 교회의 생활, 실상에 대한 역사적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 액션 활동, 복음 선포 활동들,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과 한국 최초의 공의회, 일제의 교회 탄압 등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 가톨릭신문 지면은 그 자체로 역사적 사료입니다. 더욱이 6·25전쟁 후 지식인들의 개종에 관한 이야기들, 수도회들의 진출과 창설, 각 교구와 본당들의 설립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 교계 제도의 설정 등 다른 어디에서도 온전히 찾아볼 수 없는 역사적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60년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한국 사회와 교회에 소개한 가톨릭신문의 역할은 이후 한국교회가 공의회 정신을 바탕으로 쇄신과 변혁의 시대를 맞이하는데 크게 기여해 왔습니다. 아울러 60년대 이후 한국의 역사 현실, 정치 및 사회 현실 안에서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해 온 교회가 사회 불의를 고발하고, 인간 존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해준 것은 민족과 역사 안에서도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Second alt text
가톨릭신문은 1927년 창간 이후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교회와 민족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교회 사료로서의 가치를 갖고 있다. 2017년 4월 27일 서울대교구 주교좌명동대성당에서 봉헌된 창간 90주년 기념미사 장면.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긴 휴간의 안타까움과 복간

대구의 청년회에서 발행하던 천주교회보는 간행이 거듭됨에 따라 더욱 충실하게 발행됨으로써 교회 전체의 소식지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에 따라 초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는 1928년 4월 1일 창간 1주년 기념호에서 “모든 교우들이 이 회보를 항심으로 보고 또 힘대로 도와주기를 권면한다”고 격려했습니다.

나아가 1931년 7월 7일, ‘천주교회보’를 교구 기관지로 공식 인정한데 이어, 8월 1일자에는 ‘천주교회보사’를 설치해 회보 발행을 교회 당국과 청년회가 공동으로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아울러 발행에 따른 경영상의 어려움을 해소해 주기 위해서 후원회를 조직하고 교회 전체가 회보 발행을 재정적으로도 적극 지원해 주기를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전국은 물론 해외에까지 한국 천주교회의 소식을 전하던 ‘천주교회보’는 1933년 4월 1일자를 끝으로 1949년까지 무려 16년간의 기나긴 휴간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는 전국 주교회의가 신앙 교양 잡지를 통합 발행한다는 취지로 대구와 서울의 청년회가 각각 발행하던 ‘천주교회보’와 ‘별’의 발행을 중지하도록 결의한데 따른 것입니다. 이에 따라 ‘천주교회보’는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되고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49년 4월 1일 복간까지 한국교회의 소식을 전하지 못하게 됩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