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고? 천만에…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루틴을 벗어난 의무다 보니 매일 필사하는 게 만만치 않다. 지난 목요일, 저녁 식사를 겸한 반주로 귀가가 늦어지며 필사를 하지 못했다.
다음 날 새벽, 겨우 일어나 졸린 눈 비비며 펜을 들었는데 첫 문장에 잠이 확 달아났다. ‘네가 죽은 다음에 누가 너를 기억하며, 누가 너를 위해 기도해 주겠는가?’(「준주성범」 제1권 23장)
지난 1월 캐나다의 K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딸 스텔라와 매주 한 번 줌(Zoom)을 통해 영어 수업을 하던 젊은 친구는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결국 숨을 거뒀다. 불과 일주일 전 스텔라의 어깨 너머로 반갑게 인사하던 그의 부고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딸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하는 한편으로 ‘아등바등 살아 무엇하나, 언제 이렇게 죽을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이 파고들었었다.
그런 와중에 새벽에 만난 문장은 삶의 ‘덧없음’이 머릿속에 가득할 때, ‘부질없다’는 잠시의 어리석음에 일침이 됐다. 「준주성범」은 ‘네가 언제 죽을지 모르기에 할 만한 것이 있으면 지금 하라’고 권한다. 성인들을 공경하고 본받아 벗으로 삼아야 비로소 세상을 하직하는 날 그들의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갈 것이라 한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데 집착한 나머지 죽음 또한 힘겨운 나날의 삶이 끝나는 정도로만 가벼이 여긴 것은 아닌지, 죽음을 어떻게 준비하고 그래서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되돌아본 시간이었다.
사순 시기를 살아가는 오늘, 사도 바오로의 편지가 더욱 특별하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됐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3-4)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
■ 생태적 회개 - 금육
몸 가볍고 집중도 잘 돼… 절제 통한 뿌듯함은 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