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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 의미] 세계 평화 메시지와 한국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조지혜 기자
입력일 2017-04-30 수정일 2017-05-01 발행일 2017-05-07 제 3043호 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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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깃발 휘날리며 성모님께 기도한다 온세상에 평화가 오길

□ 싣는 순서

상 - 세계 평화 메시지와 한국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중 - 올바른 성모신심

하 -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 기념행사

오는 5월 13일은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포르투갈 중서부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던 파티마에 1917년 5월 13일부터 10월 13일까지 매달 성모 마리아가 여섯 번에 걸쳐 나타났다. 그리고 파티마의 성모는 세계를 향해 세 가지 메시지를 전했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1981년,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가는 비행기에서 일어난 납치사건은 오직 파티마의 세 번째 메시지 공개가 유일한 요구사항일 정도로 파티마의 성모 메시지가 세계에 남긴 인상은 강렬했다.

파티마 성모 발현 100주년을 맞아 본지는 3주간에 걸쳐 파티마 성모 발현의 의의와 올바른 성모 신심을 살펴보고 파티마 현지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를 전한다.

■ 1917년, 포르투갈 파티마의 환경

파티마의 성모가 나타난 1917년은 1914년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이 절정에 이르는 동시에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세계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진 상태였다. 하지만 파티마는 협곡으로 둘러싸여 외부 접촉이 적고 비교적 조용하게 신앙생활에 집중할 수 있는 마을이었다. 그런 환경에서 이 마을에 사는 세 명의 어린이 루치아(Lucia dos Santos, 1907∼2005)와 그녀의 사촌 히야친타(Jacinta Marto, 1910∼1920), 프란치스코(Francisco Marto, 1908∼1919)에게 성모 마리아가 나타났다. 1917년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기에 앞서 1916년 봄, 여름, 가을엔 천사가 아이들에게 나타나 ‘용서의 기도’, ‘성체의 기도’를 함께 바치며 성모 발현을 준비하기도 했다.

1917년 파티마 성모 발현을 목격한 어린이들. 왼쪽부터 히야친타, 프란치스코, 루치아. CNS 자료사진

■ 파티마 성모가 전한 세 가지 메시지

1917년 5월 13일 처음 세 어린이에게 나타난 파티마의 성모는 10월 13일까지 매달 한 번씩 나타나 이들에게 세계 평화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치라고 요청했다. 특별히 7월 13일 세 번째 발현에서 성모 마리아는 세 명의 어린이들에게 지옥의 환시를 보여주며 “인류가 계속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 드린다면 더 무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당신의 티 없는 성심이 승리하고 평화가 올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날 파티마의 성모는 세 가지 메시지를 전했다.

파티마의 성모를 목격한 세 어린이 중 2005년까지 수도자로 살았던 루치아는 교구장의 명령에 따라 성모님을 만나며 듣고 기억한 것을 문서로 기록했다.

2000년 6월 교황청 신앙교리성이 발표한 ‘파티마의 메시지’에서는 파티마의 세 가지 ‘비밀’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비밀은 지옥의 환시다. 루치아 수녀는 “성모님께서는 저희에게 땅 밑에 있는 것 같은 거대한 불바다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불 속에는 마귀들과 인간의 형태를 한 영혼들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통과 절망의 비명과 신음 소리를 내면서 사방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둘째 비밀은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에 대한 것이다.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티 없이 깨끗한 내 성심에 대한 신심을 세우고자 하신다. 만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 실천된다면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되고 평화가 올 것이다. 전쟁은 끝이 날 것이다”라며 루치아 수녀는 성모의 메시지를 기록했다.

2000년 5월 13일에 가장 늦게 셋째 메시지가 공개됐다. 파티마의 성모를 목격했으나 어린 나이에 숨진 히야친타와 프란치스코의 시복식에서였다. 셋째 메시지는 ‘교황의 고통’에 대한 것이다. “교황 성하께서는 절뚝거리시는 발걸음으로 몸을 반쯤 떠시면서 고통과 슬픔에 짓눌리신 채, 도중에 널려 있는 시신들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산꼭대기에 오르신 교황 성하께서는 큰 십자가 밑에 무릎을 꿇으신 채 그분을 겨냥하여 총과 활을 쏘는 한 무리의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실제로 1981년 5월 13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일반 알현 도중 터키 출신 청년에게 총을 맞고 4일 만에 의식을 회복하기도 했다. 그 이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온 세상을 봉헌하기로 결심하고 인간 세계를 성모님의 사랑으로 감싸달라는 내용의 ‘의탁 기도문’을 작성했다.

올해 4월 18일 포르투갈 파티마 성지에서 신자들이 파티마 성모상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CNS 자료사진

■ 한국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평화를 위해 기도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나타난 파티마의 성모가 던진 메시지에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전 세계에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6·25전쟁으로 고통을 겪고 분단으로 인한 전쟁 위협이 시시때때로 발생하는 한국사회에 파티마의 성모가 던진 평화의 메시지는 간절함으로 다가온다.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은 미국의 콜갠(H.V.Colgan) 신부가 창설했다. 본당 신부로 사목하던 그는 ‘러시아의 회개와 세계평화’를 약속한 마리아의 약속에 큰 감동을 받고 신자들에게 ‘티 없이 깨끗한 마리아의 성심에 러시아를 봉헌하고, 매달 첫 토요일에 보속의 영성체를 하라’는 성모님의 요청에 응답하고자 하는 사람은 성모님의 상징인 ‘푸른 리본’을 달고 매달 묵주기도를 바치겠다는 서약서를 가져오도록 했다. 콜갠 신부는 “우리는 성모의 푸른 깃발 아래서 성모의 요청을 실천하는 푸른 군대가 돼야겠습니다”라고 외쳤고 이때부터 ‘푸른군대’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후 ‘푸른군대’는 1985년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은 1953년 6·25전쟁 막바지에 이른 때에 시작됐다. 1953년 주한 미군 제1해병 군종신부였던 스트럼스키(M.J.Strumski) 신부는 전쟁으로 신음하는 한국을 위해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국제본부에 파티마의 성모상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파티마가 속한 레이리아교구의 호세 코레이아 다 실바 주교는 성모 발현 장소에서 축성된 순례 성모상을 우리나라에 보냈다. 1953년 4월 5일, 판문점 인근 광장에서 당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 집전으로 파티마의 순례 성모상이 축성돼 순례를 시작하고 노 주교는 한국의 푸른군대 첫 회원이 됐다. 최전방 휴전선을 출발한 파티마 순례 성모상은 서울, 춘천, 대구, 부산, 마산을 순례했다. 순례 도중인 7월 26일, 휴전 협정으로 6·25전쟁은 중단되고 스트럼스키 신부가 본국에 귀국함으로써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활동은 잠시 멈췄다. 이후 1964년 독일 출신 트라우너(A.Trauner, 하 안토니오 몬시뇰)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한국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은 기도로써 한반도 평화정착을 꾀하고 있으며 2015년 5월 경기도 파주에 ‘파티마 평화의 성당’을 봉헌했다.

조지혜 기자 sgk9547@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