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를 둘러본 배낭여행객이 프랑스 남동부를 거쳐 파리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도시가 있다. 바로 프랑스 제3의 도시, 리옹이다.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위치를 서울에 비유한다면 마르세유는 부산, 리옹은 대구쯤 있다고 보면 된다. 오늘날 프랑스 축구리그의 ‘올림피크 리옹’으로 유명한 리옹은 기원전 로마의 군사 주둔지가 되면서 도시화됐다. 이후 13세기에는 공의회가 두 차례나 열릴 정도로 가톨릭교회로선 중요한 종교적 의미를 지닌 도시다.
비안네 신부가 첫 본당 주임신부로 발령 받은 ‘아르스’는 이곳 리옹에서 북쪽으로 직선 거리로 25~3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아르스는 가난한 농촌마을이었다. 주민 수는 240여 명에 불과했다. 성당도 오랫동안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낡은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의 신심은 깊지 않았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성당에 나오지 않았고, 기본적 교리지식조차 몰랐다. 프랑스 대혁명(1789년) 이후 태어나고 자란, 젊은이들은 더 이상 신앙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신앙보다도 향락에 더 친숙해 있었다. 거의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고, 흥청거렸다. 주일미사도 어쩌다 한 번이었다. 첫영성체 이후, 영성체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남자들이 허다했다.
그러나 훗날 이 성당에서 기적이 일어난다. 유럽 전역에서 비안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기 위해 신자들이 몰려든다. 신자들은 비안네 신부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기 위해 수천 킬로미터를 걸어서 아르스를 찾는다. 뒤에서 자세히 나올 내용이기 때문에 여기선 시골본당에 갓 부임한 볼품없는 외모의 한 젊은 사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간다.
사제관에 도착해 짐을 푼 비안네 신부는 마음이 무척 상했다. 낡고 초라한 성당에 비해 사제관이 화려했기 때문이다. 비안네는 사제관에 있는 가구들을 없애기 시작했다. 비단으로 감싼 의자와 두 개의 화려한 침대 및 이불까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었다. 남은 것은 나무 침대와 낡은 테이블, 옷장이 전부였다.
비안네 신부는 바로 ‘사목’에 착수한다. 매일 시간을 쪼개서 신자 가정을 방문했고, 신자들과 영적 담화를 나눴다. 특히 그는 강론에도 집중했다. 문장력이 서툰 그는 3~4쪽 분량의 강론 원고를 작성하기 위해 거의 매일 밤을 새웠다. 게다가 그는 강론 원고를 모두 암기했다. 신자들은 길을 걸으면서 강론 원고를 중얼거리며 외우는 비안네 신부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비안네 신부가 강론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다. 그는 이 사랑과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했다. 특히 비안네 신부는 성체를 자주 영하라고 권고했다.
“성체를 모시십시오.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수고하고 지친 자들을 쉬도록 초대하십니다.”
“영혼은 하느님과 함께해야만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이 우리 영혼을 채우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모든 가정에 식료품을 잘 보관하기 위한 저장실이 있습니다. 감실은 우리 모두의 저장실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잠시 저러다 말겠지”였다. “즐기면서 편안하게 살려 했는데, 꽉 막힌 신부님이 마을에 오셔서 골치 아프게 생겼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을 사람들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비안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명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좌절의 벽에 부딪힐 때마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또 사제의 길을 제대로 걷기 위해 잠을 자지 않고, 식사도 줄이는 등 고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늘 죄를 멀리 했으며, 하느님과 기도 안에서 살려고 노력했다.
비안네 신부의 일화를 조사하던 중, 감동적인 장면을 발견했다. 비안네 신부가 얼마나 성체 안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아르스의 한 마을 이장이 새벽 일찍 일어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멀리 비안네 신부가 보였다. ‘신부님이 이 시간에 웬일이지?’ 이장이 다가갔다. 비안네는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외치고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오, 나의 하느님, 저희 본당 신자들이 회개하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