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 시련 딛고 맺은 부부의 인연…“기적은 있다”
화농성 관절염 앓던 젊은 시절, 믿음으로 혼인 결심
1972년 9월 24일자 ‘인생의 반려자’ 찾는 신문 광고 게재
현실 여건 극복하고 결혼 성공, 슬하 차남은 사제로 봉헌
지난 10월 26일 선종한 서울대교구 삼각지본당 주임 박홍철(다니엘) 신부 부친이자 「레지오마리애」 전 편집장 박광호(모이세) 씨가 가톨릭신문을 통해 부인을 만나 혼인의 연을 맺은 사연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화제를 모으고 있다.
1972년 9월 24일자 ‘가톨릭시보’(가톨릭신문 전 명칭) 2면 하단에 ‘✛ 인생의 반려를 찾고 있음’이란 작은 광고를 찾을 수 있다. 당시 화농성 관절염을 앓아 다리가 불편했던 박광호 씨가 게재한 유료 광고였다. 내용은 이렇다. “이 사람은 30세 가톨릭신자 문학가. 오늘에 충실하고 내일에의 청사진이 있으나 불행히도 관절염을 앓는 불구자입니다. 시련을 극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려는 신념의 인간에게 ‘지팡이’가 되어주실 고운 마음씨의 아가씨는 서신 주십시오.”
이 광고가 실린 후에 한 달이 채 못된 10월 1일, 고인은 대구의 한 아가씨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순교자의 정신으로 그이에게 가겠습니다’란 말로 시작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 달여 후 11월 11일 광주대교구 경동성당에서 두 사람은 혼인성사를 받았다. 이때 주례 사제는 고인의 자작시 ‘한빛’을 낭송해 주었는데 신랑은 감격한 나머지 오열했고 성당 안은 눈물바다를 이뤘다. 병을 얻고 난 후 너무 어렵게 투병하며 삶을 이어온 것을 하객 모두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살 돌날에 발생한 병은 유소년기를 거쳐 청년기를 지나는 내내 그를 힘들게 했다. 대수술을 포함한 온갖 치료를 받아도 차도가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도 시문학에 충실하며 문학가로서 열정을 일깨웠던 고인은 세례를 받고 레지오 마리애에도 입단해 열심히 활동했다.
이런 상황에서 결혼을 생각한 것은 어느 날 묵주 기도 중 들린 음성 때문이었다. ‘너는 낫는다. 반드시 너를 낫게 해주신다’는 것이었다. 구약의 욥처럼 혹독한 고통에 시달리며 완쾌될 가능성은 없다고 여긴 그에게 이는 헛생각이었다. 그런데 묵주 기도를 할 때마다 똑같은 음성이 들려왔고, ‘하느님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낫겠습니까?’하고 묻자, ‘결혼해야만 낫는다’는 응답이 왔다. 믿기 어려웠지만, 아무리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느님께서는 가능케 하신다는 믿음으로 반려자를 찾았다. 그리고 가톨릭시보에 광고를 내기에 이르렀다. 세상 사람 눈에는 만용으로 보였을지라도 어느 곳에 반드시 반려자가 있으리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때 편지를 보내온 이는 27세의 송춘란(안젤라) 씨였다. 수도성소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로 수녀회 입회를 포기해야 할 처지에서, 심란한 중에 미사 참례를 위해 성당에 갔다가 신문 광고를 본 것이다. 광고문을 읽으며 ‘수녀가 되려고 그처럼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 아닌가!’라는, 마치 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반려자를 애타게 찾는 이 남자를 통해 하느님께 봉헌하자!’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두 사람은 서신 왕래와 전화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송 씨 부친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를 무릅쓰고 결혼은 성사됐고, 그로부터 7개월여가 지나 고름이 나오던 환부 아홉 군데는 하나씩 메워져 1973년 6월 30일 깨끗이 치유됐다. 고인은 생전에 가톨릭신문에 기고한 신앙수기에서 이를 “하느님께서 나를 통해 보여주신 기적이었다”고 했다. 부부는 슬하에 형제를 뒀다. 차남이 박홍철 신부다.
박 신부는 부모님과 가톨릭신문에 얽힌 사연에 대해 “두 분이 결혼한 다음 어렵고 힘든 부분도 많았지만, 그 이야기 속에서 가톨릭신문을 통해 또 기도를 통해 순수하게 부르심에 응답한 두 젊은이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며 “삶이 힘든 많은 분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주연 기자 mik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