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한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 있는 존재에 대해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미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
석가세존께서는 999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차례로 죽여 손가락을 잘라 목걸이를 만든 흉악범 앙굴리말라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원래 이름은 아힘사(Ahimsa). 아힘사란 불살생(不殺生),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마하트마 간디도 늘 불살생, 비폭력을 사람들에게 가르쳤지요. 심지어 나를 죽이려 달려드는 자들에게도 절대로 폭력으로 저항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다. 한 명을 더 죽여 1000명을 채우려던 앙굴리말라는 세존의 “존재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는 말씀에 크게 회심해 정말로 아힘사, 세존의 진짜 제자가 됐습니다.
얼마 전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강 아무개가 전자발찌를 끊고 여성 2명을 죽인 사건으로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사형폐지를 주장해 온 나이지만 순간적으로 저 놈은 엄벌에 처해 마땅하다는 생각이 일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수년 전 나에게 ‘경애하는 김 변호사님’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냈던 사람이더군요. 사연인즉 교도소 감방에서는 평일 8시간, 휴일에는 12시간씩 음악, 연예, 오락 TV프로그램을 보여 주는데 자신은 조용히 있고 싶어 독방을 원하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천주교인권위원회를 통해 이런저런 도움을 주어 왔기에 출소 후 그가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옛날 앙굴리말라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성경 이야기들이 그러하듯이 저 이야기도 비유의 가르침이겠지요. 전쟁도 아닌 평시에 999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죽이는 게 실제로 일어남직한 일은 아닐 터. 하루에도 몇 번씩 형제를 미워하고, 돼지를 죽여 삼겹살을 구워 먹고, 빨갱이를 처단하고 싶고, 태극기 할배들이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너와 나 우리 모두가 바로 앙굴리말라라는 비유입니다. 그동안 내가 사람들을 미워한 적이 어디 1000번 뿐이겠나요.
세존께서는 이런 앙굴리말라, 우리를 향해 “나는 존재에 대한 폭력을 멈추었다. 너희도 멈추어라”고 명령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엄청나게 중대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사형은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형은 불가침의 생명과 인간존엄에 대한 모욕이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자비로운 심판에 반하는 것이며 죄에 대한 공정한 결말이 이뤄지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는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무고한 이들뿐만 아니라 죄인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범죄자도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의 불가침’ 권리를 가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교황님 말씀에 따르면 세상에 둘도 없는 악인 강 아무개의 생명도 하느님의 선물이요, 그를 사형시키는 건 하느님의 자비로운 심판에 반하는 폭력이라는 겁니다.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지만 그래도 어쩔 것입니까. 예수님도 우리 이 앙굴리말라들을 위해 당신 목숨까지 내놓으셨으니.
어느 대선 예비후보는 사형선고 후 6개월 안에 반드시 집행을 하도록 법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이미 24년 동안이나 집행을 하지 않아 사실상 사형폐지국이 된 현실을 그 누구도 다시 옛날로 되돌리지는 못할 겁니다. 나라의 미래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정치인이라면 그저 대중들의 분노, 공포에만 편승할 게 아니라 이런 정도의 비전은 제시해야겠지요. 노르웨이 총리는 2011년 한 명의 테러범에 의해 희생당한 69명의 청소년들을 추모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충격을 받았지만 우리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러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개방성, 더 많은 인간애입니다. 단순한 맞대응은 절대 답이 아닙니다. 만약 한 사람이 그렇게 많은 증오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랑은 얼마나 클지 상상해 봅시다.”
그렇습니다. 힘사(폭력, 살생)에 대한 답은 오로지 아힘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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