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마당] 영화 〈콘클라베〉를 통해 돌아본 신앙인의 자세

최근 개봉한 영화 <콘클라베>를 보고 신앙인으로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인간 창조 섭리를 다시금 숙고하게 되었습니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교황청을 배경으로 한 최고의 정치 드라마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황 선출에 따른 온갖 음모와 권력 투쟁에 대한 현상을 뛰어넘어 개인적으로 교황 선출 과정에 대한 궁금증과 함께 가톨릭 신앙의 본질과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자세를 다시금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잔잔한 감응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이 영화 속으로 잠시 들어가 봅니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교황청은 혼란에 빠집니다.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전 세계의 추기경 108명이 철저한 보안 속에서 시스티나 경당에 모입니다. 콘클라베(Conclave)라 불리는 이 과정은 신성한 의식이자 치열한 정치 싸움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펼쳐졌습니다. 스캔들, 배신, 음해, 권력 다툼이 얽힌 선거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던지는 의미와 메시지를 개인적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권력의 속성입니다. 신앙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교황 선출 회의조차도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둘째, 도덕성과 인간의 나약함입니다. 신의 뜻을 따르려는 이들이 인간적인 욕망과 갈등에 휘말리는 모습을 통해 깊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셋째, 선택의 의미입니다. 한 사람의 결정이 전 세계에 미치는 커다란 영향력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교황 선출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인물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후보가 되고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져 ‘세상사가 거의 엇비슷하구나’, ‘이 또한 나약한 인간의 행태에 지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게 됩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도 대선이든 총선이든 처음 기대와는 달리 의외의 변수가 크게 작동한다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 또한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신비로운 일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고 믿게 됩니다. 신의 인간 창조는 신비스러움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인위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하고 거스르는 일은 어리석음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성소수자나 양성을 한 몸에 간직하고 태어남도 역시 신의 섭리라 믿어야 하겠지요.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특별한 목적이 있음에 분명하니까요. 이를 거슬러 자신이 원하는 대로 수정하거나 강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뜻을 역행하는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습니다. 교우들 중에는 신부님과 수녀님 때문에 성당에 나오기 싫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제가 볼 때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알면 다쳐~”,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어쩌면 교황청의 교황 선출이나 본당의 상황, 그 어떤 것도 자신의 신앙을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는데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듯이 하느님에 대한 확고한 신앙은 어떤 구실과 핑계에도 뛰어넘을 수 있는 강력한 처방전임을 믿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1데살로니카 5,16-18)라는 말씀에서 확고한 신앙인의 자세를 찾고자 합니다. 글 _ 전재학(대건 안드레아, 인천교구 중3동본당)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2면

산불 이재민에 희망 전하는 그리스도인

지난 3월 21일부터 경남과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한 대형산불 주불이 모두 진화됐다. 지금까지 최대 규모였던 3년 전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 산불보다 더 큰 피해를 준 역대 최대 규모다. 더군다나 상당한 인명 피해까지 발생해 안타까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강풍 탓에 대형산불로 확산했고, 기후변화 때문에 산불이 더 자주, 더 크게 일어난다고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과도한 산지 개발과 벌목, 침엽수 위주의 숲 조성 등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지 않은 인간의 욕심에 근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눈부신 기술의 발전은 지구환경을 이용하는 것을 넘어 파괴하기까지 이르렀지만, 커다란 자연재해를 마주할 때면 자연 앞에서 한낱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를 절감하게 만든다. 하느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아울러 피해 지역 주민들을 돕는 일에도 더욱 큰 관심이 필요하다.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이재민들이 망연자실한 상태로 막막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정부가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분명한 한계가 있기에 국민적 관심과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전국 각 교구를 비롯한 여러 기관·단체들은 이미 피해 지역을 위해 긴급구호 기금을 지원하고, 성금을 모으는 데 앞장서고 있다. 특별히 사순 시기를 지내고 있는 지금, 실의에 빠진 이들을 위한 교회의 나눔 실천에 적극 참여하자.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피워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증거하고 보여줄 때다.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3면

내일이나 모레쯤

‘내일이나 모레쯤’이라고 말하고 나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늘 지금 당장 뭔가를 처리해 가며 자벌레처럼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우리들에게, 비록 일순고식(一瞬姑息)의 쉼표일지라도 ‘내일이나 모레’라는 평지 길이 있다. 터널을 지나면 어떤 풍경이 나올지 모르는 첫 여행길처럼 내일이나 모레면 대개 하늘은 개이고 바람도 따뜻했더랬다. 내일이나 모레가 될 때까지 우리는 각자 다른 길을 걸어도 서로 연결되어 있고, 내일이나 모레가 선물이 될 때까지 자기자신을 뒤적이며 희망의 씨앗을 확인하게 되니 참 좋았다. 지금 내 삶의 자리를 차분하게 해주는 말, “내일이나 모레쯤 우리 다시….” 기쁨주일이다. 다들 잠시 쉬어가자고 그런다. 매일 놀기만 하는 백수도 노는 것 멈추고 하루쯤 쉬어보자며 우스개를 한다. 변화가 필요한 것이다. 세상에는 느려서 문제가 되는 경우보다 빨라서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의지보다 신의 섭리가 끝내 이긴다는 말은 애국가의 후렴처럼 입에 잘 붙여 두어야 한다. 시간의 선물을 놓치지 않으려면 육식동물 같던 번득임을 내려놓고, 한가한 초원의 양들처럼 내일이나 모레쯤으로 시간을 건너짚는 여백을 만들어야 한다. 그 상상만으로도 옆 사람의 표정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과의 오랜 인연 때문에 나는 자주 수도원 전례에 참례한다. 신자들의 좌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수도승들은 긴 복도에 늘어서서 전례 준비의 스타치오(Statio)를 한다. 스타치오에 대한 유래와 번역이 여럿 있지만, 내게 각인된 말은 ‘수렴’이다. 여기저기로 분산된 것들이 한 곳으로 집중된다는 의미를 담은 수렴!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말의 근원을 찾아가면, ‘들으라 아들아’라는 규칙서의 첫 문장도 만나게 된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공동체의 일상을 또 다른 모멘트로 하나가 되게 하는 것, xy축의 평면을 z축으로 확장하여 입체가 되게 하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앞과 뒤뿐만 아니라 위아래로 층을 쌓는 자기관조를 통해, ‘지금 여기’의 거룩함에 이르게 되고, 그 숨죽인 고요의 문을 열고 새로운 풍경 속으로 흡수되는 것이리라 상상해 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나도 일상의 스타치오를 한다. 오늘이 며칠이며 어제는 어땠고, 어제 계획한 오늘의 일은 어떤 것이 있었는지 시간의 끈 잇기를 한다. 나의 좌표가 확인되기까지 5분 정도를 보낸다. 그런 습관 덕분에 누군가가 내게 무슨 제안을 해 올 때면, ‘고맙습니다. 집에 가서 우리 아부지한테 물어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시간을 놓쳐 기회를 날려버리는 한이 있을지라도, 내게 허락된 것은 어차피 나의 것이 된다는 믿음인 것이다. 일상의 소중함, 순발력보다는 항구함이 참인생인 것을 알기까지는 누구에게나 최소 60년 정도의 세월은 필요하지 않을까? ‘내일이나 모레’는 너무 먼 시간이 되어버린 오늘을 산다. 번득이는 인간의 지혜와 숨가쁜 문명의 변화가 인류에게 과연 무엇을 안겼는가. 더군다나, 전리품을 챙기듯, 정의를 가장한 약탈을 일삼는 국내외 정세를 보면, ‘아, 여기가 바로 소돔 땅이구나!’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제발 먼 세월도 말고, 내일이나 모레쯤까지만이라도. 글 _ 하삼두 스테파노(명상그림 작가)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2면

팬데믹 이후, 다시 희망

3월 24일 저녁 서울 명동의 세종호텔 앞. ‘세종호텔 해고노동자와 함께하는 미사’가 봉헌되는 중에 눈에 띄는 장면이 있었다. 건너편 도로에 진입 차량의 고도를 제한하는 철제 구조물 꼭대기에 올라가 고공농성하는 해고노동자 고진수 씨였다. 고 씨는 호텔 내 일식집 주방장이었다고 한다. 2021년 호텔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영난을 이유로 정리해고한 12명에 포함됐다. 고 씨를 비롯한 해고노동자들은 호텔 측이 특정 노조를 겨냥해 부당한 해고를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호텔 경영이 팬데믹 이후 다시 흑자로 돌아선 지금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을 복직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3년여 만에 국내외 여러 이슈들로 팬데믹은 어느새 기억에서 흐릿해져 갔지만, 팬데믹이 할퀴고 간 크고 작은 상처는 아직 우리 주변에 남아있다. 팬데믹의 직·간접적인 영향이 얼마나 컸는지, 지금도 그 영향이 이어지고 있는지 여러 취재 현장에서 드러난다. 교회의 경우 사회적 거리두기의 여파로 대면 만남이 불가해 각종 평신도 모임이 활력을 잃었었는데, 2025년 현재 “올해 모임은 팬데믹 이후 첫 대면 모임이다”라는 말을 아직도 듣게 된다. 심지어 팬데믹 이전에도 감소 추세였던 교회 내 청년 활동은 타격이 더욱 컸다. 하지만 그만큼 이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과 밝음도 찾을 수 있다. 팬데믹 이후 첫 모임을 열게 된 사목자, 참여하는 신자들의 표정에는 모두 기대와 기쁨이 어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희망의 낯빛이 팬데믹으로 삶의 결정적인 것들을 잃은 많은 이의 얼굴에도 나타나기를 바란다. 추운 날씨에도 철제 구조물 꼭대기에 올라가야 했던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3면

시노드 교회 실현 노력 일상화 돼야

시노드 교회 실현을 위한 노력이 구체화될 것으로 보인다. 주교회의는 최근 열린 2025년 춘계 정기총회에서 시노드 교회 실현을 위한 다각적인 방안들을 모색, 구체화하기로 했다. 주교회의를 통해 이뤄진 한국교회 전체 차원의 방안들이 각 교구와 본당을 중심으로 일상의 문화로 정착되기를 희망한다. 주교회의는 총회에서 우선 주교회의와 교구별로 시노드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이 시노드팀은 한국교회 전체 안에서 시노드 교회를 어떻게 구체화시킬 것인지의 방향성을 모색하고 이를 사목 현장 안에서 구현할 방안들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와 함께 평신도와 수도자, 성직자 등 교회의 모든 계층이 참여하는 시노드 모임을 교구 차원에서 우선 진행해 활성화한 뒤 전국 단위의 시노드 모임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시노드 교회 건설은 어느 한 분야나 과업의 추진으로 이뤄질 수 없다. 교회와 신앙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시노달리타스 문화가 정착되고 그것이 신자 생활 전반을 이끄는, 교회의 운영 원리로 정착돼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과업이 단기간에 이뤄질 것이라고 성급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노드 교회 실현을 위한 노력은 가시적인 성과를 점검할 수 있는 단계적인 조치들을 기반으로 진행돼야 한다. 이를 위해 전국 및 각 교구 차원의 기구와 조직들을 운영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아울러 시노달리타스를 구현할 수 있도록 교회법과 규범, 제도의 수정과 보완을 위한 노력도 요구된다. 이제 본격화된 시노드 교회 건설의 이행 단계가 그 원동력을 잃지 않고 지속적으로 추진돼 시노드 교회 실현 노력이 일상으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3면

돌이켜 보기를…

올해는 일제의 식민 통치를 끝내고 해방을 맞이한지 80년이 되는 해다. 우리 주변에서 80세가 안 되는 이들은 겪어보지 못했을 식민지 경험이다. 식민 통치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주권을 잃은 것이다. ‘이제 조선은, 대한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주권을 잃었다는 것은 단지, 나라 이름과 깃발, 노래를 잃었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한 민족이 가진 역사와 관습, 전통과 더불어 살아오던 모든 양식을 빼앗긴 것이다. 문자와 말을 잃어버린 것이며, 삶을 잃어버린 것이다. 주인의 삶이 아니라 부속물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35년간의 식민지 삶을 청산하고 해방을 맞이한 날은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은 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해방은 모든 것을 되찾아오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해방된 조국에서 꿈에 그리던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고 싶은 것은 모두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절 우리 가운데에는 식민지 통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더 큰 외부 세력에 나라의 존망을 맡기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 내지 못한 광복은 우리 안의 아픔을 계속해서 만들어 냈다. 분열과 파괴, 미움을 넘어서 증오, 증오를 넘어선 혐오. 나와 생각이 다르다면 그와 그 가족의 목숨마저도 가볍게 여기는 수많은 테러와 학살이 일상화되었다. 해방을 맞이하여 당연히 한마음이 되어 일구어야 할 새로운 역사는 일찌감치 피로 물들고 말았다. 또다시 4·3을 맞이했다. 77년이 지났지만, 아직 이름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아픔으로 가득 찬 사건이다. 당시 30만 명의 도민 중 3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추정된다. 열 명 중 한 명이 역사의 잔인한 기록으로만 사망, 또는 사망 추정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참담함이었다. 그야말로 유해도 찾지 못한 쓸쓸한 넋은 지금도 제주 섬 어딘가에 묻혀 있다. 1948년 11월 17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계엄령이 선포됐고, 1948년 12월 1일 국가보안법이 제정됐다. 우리의 나아갈 발목을 잡고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그 무시무시한 계엄령과 국가보안법 말이다. 육지에서는 쉽게 느끼기 어렵지만, 아직도 제주에서 4·3이라는 단어는 함부로 쓸 수 없는 말이다. 한 집안에서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얽혀 있고, 서로를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는 피해망상의 연속이기도 했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된 이후에도 4·3의 망령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연좌제와 국가보안법의 족쇄가 유가족들을 얽어맸으며, 고문 피해로 인한 후유장애, 레드 콤플렉스 등 정신적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4·3으로 인해 일본으로 피신한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고, 수형생활을 하다가 돌아온 사람들은 공안기관의 감시에 시달렸다. 그리고 4.3은 아직도 무수한 이야기를 남긴 채 정리되지 않은 파일로 남아있다. 작년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복잡한 혼란 속에 던져져 있는 대한민국이다. 서로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사람들은 오늘의 형국을 일컬어 해방정국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언제든 서로를 적으로 여겨 테러와 시해의 대상으로 여길 수 있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세계는 전쟁의 포화 가운데 여기서 저기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아우성치는데, 우리는 우리 안의 전쟁을 이미 시작하고 있다. 결국, 남는 것이라고는 폐허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끔찍한 역사를 반복하려는 것같이 보인다. 역사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데 우리의 어리석음은 그 잘못을 끊임없이 이어가고 있다. 증오를 부추겨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고 이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다면 역사를 다시 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었는지…. “증오, 폭력, 극단주의, 맹목적 광신주의를 선동하는 데에 종교를 이용하는 행태를 척결하고, 또한 살인, 추방, 테러, 억압 행위들을 정당화하는 데에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하지 않게 하는 데에 모든 이가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세계 평화와 더불어 사는 삶을 위한 인간의 형제애) 프란치스코 교황과 알아즈하르 대이맘 아흐메드 알타예브가, 가톨릭과 이슬람 수니파의 수장이 손을 맞잡으며 공동 서명한 역사적인 선언이다. 이 선언이 우리 안에 깊은 울림이 되기를 바란다. 지금 마음에 증오가 차오른다면 무엇을 위한 증오인지 보아야 한다. 역사와 진실을 저버린다면 똑같은 아픔을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3면

재난 가방

얼마 전까지 나와 지인들이 가끔 나누던 화제는 앞으로 곧 있다는 후지산 폭발과 난카이 대지진에 대한 것이었다. 동일본 쓰나미야 일본 열도가 가로막혀 있고, 또 거리도 상당하다고 하지만 난카이 해구는 부산 앞바다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염려스러웠다. 한번은 가족 모임에서 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공계 학위를 가지고 있으며 평생을 과학 도시에서 살고 있는 오빠가 “그거 7월 5일쯤 난다고 하니 그 무렵엔 절대 일본에 가면 안 될 거야” 하기에 마음속으로 그 날짜를 새겨두고 다른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오빠 그거 지질 연구소나 해양 연구소 친구분들이 측정한 거야?”라고 묻자, 오빠가 태연하게 “아니 일본 예언가가 그랬다는데 유튜브에 나와” 하는 것이었다. 순간 입에 물고 있던 음식을 뿜을 뻔했던 건 비밀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40년 내로 그 일이 일어난다는 것만이 확실했고, 그 날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산 중턱에 살고 있으니 좀 낫겠지’ 했는데 그만 얼마 전 지리산 너머에서 산불이 나고 말았다. 지리산 북쪽에서 시작된 산불이 내가 글을 쓰는 순간에도 꺼지지 않았다고 한다. 지리산국립공원과 그 권역이 서울시의 1.5배 정도로 넓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주일째 불이 지속되자 남의 일 같지 않았고 바람이 불면 가슴이 후르르 쓸려나가곤 했다. 두려움도 있었고 근심도 있었다. 다시 또 생각하는 일이지만, 은총이 아니라면 한순간이라도 우리에게 안전한 곳이 있을까 싶다. 이번에 불이 난 곳은 드론을 타고 우리 집에서 하늘을 올라가면 몇십 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이기에 나도 크게 안심하고만은 있을 수가 없긴 했다. 전화기에서는 계속해서 경보가 울리고 집 뒤 봉우리로 헬기들이 쉴 새 없이 날아가고 있었다. ‘만일 우리 동네에도 경보가 울리면 나는 무엇을 가져갈까’ 싶어 소위 재난 가방을 챙기려고 작은 여행 가방을 꺼냈다. 우선 지갑 여권 그리고 노트북 …. 그러고 나자 더 넣을 게 없었다. 3일 여행에도 뚱뚱한 가방을 싸던 나였는데 그냥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집이 불탄다고 가정을 하니, 하나도 넣을 게 없었다. 고심 끝에 겨우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보조 배터리와 커피 텀블러였다. 피식거리며 웃음이 나왔다. 재난경보를 받고 챙겨야 할 것이 이거라면 이 지상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을 때 나는 무엇을 챙길까. 오래전부터 나는 죽음을 연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성인의 말씀대로 ‘새의 발목을 쇠사슬로 묶어놓든 명주실로 묶어놓든 날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라는 것을 새기며 이 지상을 떠날 때 혹여라도 미련을 둘 것을 하나씩 정리해 왔다. 그리고 요즘 들어 얼마간은 정리했다고도 생각했다. 아빌라의 성 데레사의 말처럼 ‘삶을 낯선 여인숙의 하룻밤’까지 여기지는 못했어도, ‘누군가 공짜로 주신 좋은 리조트에서의 여러 날’이라고 생각해 왔다. 처음 도착할 때부터 “내가 부르면 너는 와야 한다”라는 조건으로 살게 된 이곳. 그러니 부르시면 손에 쥐었던 모든 것을 놓고 기쁘게 “네!”하고 대답하고 싶은 것이 내 소망이다. 사람들은 묻는다. “너무 비관적인 거 아냐. 뭐 그런 생각을 해.” 나는 앞날에 대해 그리 세세하게 근심하는 스타일의 사람은 아니다.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는 철학을 학창 시절부터 지켜왔다. 숙제도 결국 못한 적이 많았고 시험은 초치기가 거의 다였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한 의식은 나의 삶을 더 경쾌하고 가벼우며 의미 있고 감사로 가득 차게 만들어준다. 생각해 보라. 언제 떠날지 모르는 리조트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아름답다면 당신은 커튼을 치고 낮잠을 자겠는지 아니면 그곳을 돌아보며 감사하겠는지. 하느님 부르시면 텀블러도 여권도 소용없겠지. 다만 그게 지금이라면, 그래서 죽기 전에 소망이 하나 있다면 국회의원들 세비 뺏어다 우리 고생하시는 소방관들에게 다 드리고 싶다. 글 _ 공지영 마리아 소설가

발행일 2025-04-06 제3436호 22면

희망을 품고 걷는 십자가의 길 위에서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이마에 재를 얹으며 시작된 사순 시기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상기시킨다. 가난한 한계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걸어갈 수 있는 길을 십자가에서 발견한다. 어긋나고 균열이 가 폐허 된 세상 곳곳을 바라보며 ‘희망의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희망의 근간을 부조리한 현실과 인간 실존의 어둠을 뚫고 십자가의 길 위에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큰 사랑으로 걸음을 떼어 길을 내시고, 급기야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성심에서 샘 솟는 사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연민의 마음으로 길을 내신 예수님의 우주적 사랑을 거슬러 사사로운 생각의 틀에 붙잡힌 악의 하수인들에 의해 십자가형은 집행되었다. 여전히 행해지는 불의의 한가운데서 과연 어떻게 ‘희망을 품은 순례자’로서 발걸음을 떼어갈 수 있을까. 독일 출신의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20세기 정치철학의 중요한 사상가인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사유’는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에서 히틀러 정권 당시 나치 독일에서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과정을 다루며, “히틀러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 그를 비판했다.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재판을 지켜본 아렌트는, ‘공무원’으로서의 아이히만의 진정한 무능은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는 것에 있다고 보고했다. ‘현실에 맞서 말할 수 없는 무능’,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할 줄 모르는 무능’,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없는 무능력’ 안에 깃든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지닌 이가 곧 아이히만이다. 악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 채 개인주의에 머물러 아무 식별 없이 시키는 대로 행동할 때 드러난다. 공동선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명령 혹은 사적 안위만을 따르는 것은 악을 유발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비극은 계속된다.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제주 4·3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 세월호 침몰사고, 이태원 참사, 심지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학살에서도 ‘악의 평범성’이 낳은 참상을 목격할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조직사회 상부의 명령이다. 이 명령이 공동선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식별해 수행하는 것이 명령 혹은 사명을 수행하는 이들의 자질이어야 한다. 12·3 비상계엄 당시 상부의 명을 받고 출동한 군 장교 중에는 상황을 파악한 후 부하들에게 총을 뒤로 메라고 한 이도 있었고,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맡은 직위에서 숙고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유하는 상급자는 항명하며 수하들을 바르게 통제할 수 있다. 악의 실체가 드러난 12·3 비상계엄에 대항했던 성숙한 시민들과 죽음을 불사하고 진실한 증언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어 우리가 빛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진정성 있는 이들과 달리 법 지식을 악용해 법망을 빠져나가는 법조인들과 위헌·위법에 위증을 일삼는 최고 통치권자에 대해 마땅한 판결이 내려지길 기다려 왔다. 십자가는 생사를 넘나드는 식별을 통해 수락한 사랑의 결정체이다. 예수님이 받아안은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답하는 말씀(프란치스코 교종)이다.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서도 묵묵히 정의를 지켜내고, 마음이 일러주는 하느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 길어 올린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잠깐 멈춰 십자가에 깃든 하느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어둠 한가운데서도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 _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이은주(마리헬렌) 수녀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3면

나는 당신을 이해해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다고 모든 인간의 난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해도, 그리스도교적 진리는 제게 큰 힘이 됐어요. ‘운’처럼 보이지만 그 이전에, 모든 것의 시작에 시작을 만든 ‘누군가’(하느님)가 존재한다면, 또 그의 행동 원리가 ‘자비’와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면! 거기서 살짝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죠.” 성유빈 씨(에디트 슈타인·21·인천 마전동본당)가 바쁜 일상에서도 ‘청년, 희망의 현재진행형’ 기획 인터뷰에 선뜻 화답하고 들려준 말이다. 성 씨를 비롯한 청년들 모두 각자의 인터뷰에서 결이 같은 말을 해서 감동이었다. 개인 영성과 평안함 추구에서 기도가 그치는 이들과 달리, 부조리한 세상에서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통찰하는 청년다운 순수함이 녹아 있었다. 그런 청년들이 과연 신을 거부하기에 종교를 떠나갈까. 취재하며 만난 청년들은 냉담 중이더라도 존재론적이었고 물질 너머의 가치를 좇았다. 독실한 집안 분위기에도 냉담 중인 현아(가명·30·안젤라) 씨는 착취적 가축 산업에 반대해 채식주의자가 됐고 피혁 제품도 쓰지 않는다. “인간은 착취자가 아니다”라며 제로웨이스트도 실천한다. “그럼에도 신앙을 느낀 적 없다”는 현아 씨는 “나처럼 스스로 떠나온 부류에게는 교회에도 천국에도 나를 위한 공간이 없을 줄을 안다”며 적적하게 웃었다. 그런 청년들에게 “늦기 전에 회개하시오”라는 말만큼 폭력적인 게 있을까. 그때 내가 주변 신부님께 받았던 위로가 기억났다. 큰 상처에 대해 털어놓은 어느 날, 신부님은 “하느님은 오로지 공감하시는 분”이라며 단죄는커녕 포옹해 주셨다. 그래서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현아 씨, 우리는 같아요. 당신을 이해해요.”

발행일 2025-03-30 제3435호 23면
기사 더보기더보기아이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