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도 얼마나 참았다가 쏜 건데”

한 지인이 하소연을 해왔다. 먼 집안 조카를 데려다가 일을 시켰는데 어느 날 그 조카가 회삿돈을 들고 남자와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경찰에 바로잡히기는 해서 손실은 크지 않았지만, 지인은 덧붙였다. “얌전한 아이였는데 설마 이런 어리석은 일로 자기 자신을 망치고 나와의 관계를 끊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 했어요.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지인에게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나 역시 그런 일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였다. 돈 계산을 알아서 하시라고 어떤 이에게 그걸 맡기고 믿었던 것은, ‘나중에 이 모든 일이 점검되면 횡령이 드러나고 그 자신은 밥벌이를 잃을 텐데 설마’라는 안이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중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점검해 보니, 그가 내 돈을 많이 횡령해 왔다는 것이 드러났다. 당장 거래는 끊겼고 나와의 계약은 파기되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아주 곤궁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의 교만은 “내가 없으면 자기가 돈을 벌지 못할 텐데 설마 그런 어리석은 짓을”에서 멈추어 있었고, 나중에 나는 내 게으름과 교만을 깊이 반성했다. 지금 생각해도 아픈 기억이다. 잘못은 그가 했지만 내 탓도 없다고는 할 수가 없었다. 그 무렵 어릴 때 읽은 이솝 우화가 떠올랐다, 어느 지역에 홍수가 나서 전갈이 고민하는 이야기 말이다. 전갈은 물가에 서서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두꺼비 한 마리가 막 강을 건너려고 하는 게 보이자, 전갈이 말을 건다. “두꺼비야 나를 네 등에 태워서 물을 좀 건네주라.” 두꺼비가 대답한다. “전갈아, 나는 너를 알아. 네게는 독이 있는 침이 있고 그걸로 다른 생물들을 죽여 왔잖아. 그런 네가 내 등을 한 방 쏘면 난 죽을 텐데 싫어.” 그러자 전갈이 대답한다. “그런 걱정을 하다니, 생각해 봐라 만일 네가 헤엄치는 동안 내가 널 쏘면 너는 가라앉고 수영 못하는 나도 같이 죽을 텐데 그런 어리석은 일을 내가 하겠니?” 두꺼비가 생각하기에 그 말은 일리가 있었다. 그래서 마음 착한 두꺼비는 전갈을 태우고 헤엄쳐간다. 그러나 물 한가운데쯤 갔을 때 등으로 따끔한 충격이 왔다.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이가 없는 두꺼비가 묻는다. “네 입으로 그런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을 거라더니? 이러면 우리 다 같이 죽는 거잖아.” 그러자, 전갈이 대답했다. “아아 미안해! 그러나 이것도 얼마나 참았다가 쏜 건데.” 어린 시절 나는 대체 이 우화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기에 이걸 기억하고 있었다. 해석되지 않는 불편함으로 말이다. 그러나 나이 들어 많은 고통을 겪고 이 우화를 보자 선명하게 그 뜻이 보였다. 다시 생각해 보니, 사람이라는 게 그렇게 이성적이라면 전 세계의 감옥이 그렇게나 만원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우화의 뜻을 젊은 그때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내 인생은 다른 길로 갔을까?’, 나는 그 후로도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전갈의 그 특성은 다른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내게도 있을 테니 설사 이 모든 것을 알았다 해도 나 역시 다시 이 어리석은 길을 걸어오지 않았을까 싶긴 하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도, 자신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의 본성을 아는 것이 이렇게나 중요하다. 내가 전갈이 아닌지, 내가 두꺼비가 되려는 것은 아닌지.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큰 선거를 앞두고 두꺼비와 전갈을 떠올려본다.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내가 너를 안다는 그 말!

오랜 친구들이 있다. 십대 초반에 만나 지금까지 헤아리기 무서울 만큼 긴 시간을 함께 했다. 우리는 서로의 안타까운 첫사랑도 알고 꿈을 찾느라 흘린 땀도 알고 엄마로서 딸로서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도 안다. 하지만 처음 만날 때는 똑같은 단발머리였는데 이젠 다르다. 살아가는 도시도 자주보는 사람도 지지하는 정당도 다르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니 하고 싶은 말이 많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친구가 누구를 지지하는지는 물으나 마나다. 안다. 참아야 한다. 부자 지간이라도 종교와 정치 얘기 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상대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절대 안된다고 생각하니, 친구를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어서 그 거짓의 선동에서 헤어나오라고 소리치고 싶다. 어떤 날은 그 후보가 싫으니 친구까지 이상하게 보인다. 이래저래 저 혼자 속이 시끄럽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같은 학교를 다녀 어릴 적부터 알고 가끔 만나 밥도 먹고 얘기도 나누는 사이, 이 사람은 친구일까? 지인일까?” 예리한 질문이었고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선거에다 질문까지 겹쳐 복잡한 마음으로 무릎이 아프도록 걸었다. 그러다 집에 돌아와 시리즈 드라마 한 편을 보았다. 보다가 ‘폭삭’ 울었다. 나를 울린 드라마는 ‘폭삭 속았수다’ 였다. 명장면 하나가 있었다. 세월이 훌쩍 지나, 세상 풍파와 시련을 겪은 애순이 치매로 기억을 잃은 할머니 곁에 앉아 있다. 애순이 할머니에게 말을 건다. “할머니 이는 까막새가 안 갖다 주잖아, 이제 내가 해 드려야지.” 그때 할머니는 천천히 애순의 손을 잡고 말한다. “니 속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 그 한마디에 애순은 눈물보가 터지고 만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세월의 기억을 다 지운 듯한 할머니였지만 실은 다 알고 있었다. 사랑하는 손녀가 가장 마음 아픈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힘들다 속상하다 말한 적 없지만 할머니는 듣지 않아도 알고, 보지 않아도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속을 다 안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안다는 것은 그런 힘이 있는 말이다. 그래, ‘친구’는 속을 아는 사람이다. 또 다른 나, 그래서 말 하지 않아도 그 속을 알고 눈물을 알고 짐을 아는 사람이다. 함께한 시간 속에 쌓인 깊은 이해, 그리고 형식보다 진심이 앞서는 마음, 잔잔하지만 깊이 있는 연결이 바로 친구인 것이다. 한 걸음 나아가 그의 짐과 허물을 같이 져줄 수 있다면 그는 절친이다. 우리가 언제 정당의 지지 성향을 보고 친구를 먹었던가! 그랬으면 이렇게 오래 함께 할 리도 없지만 친구일리도 없다. 그저 지인일 뿐. 그날 밤 굳이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읽었던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며’를 고이 적어 친구에게 보냈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이것은 고백이자 다짐이었다. 너는 나를 아는 사람이므로, 나 역시 너를 앎으로. 글 _ 양희 아녜스(다큐멘터리 작가·감독)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2면

‘찬미받으소서’ 정신 실천해야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회칙 「찬미받으소서」 반포 10주년을 맞아, 공동의 집 지구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기로 다짐하고 있다. 레오 14세 교황은 회칙 반포 10주년을 맞아, 이 회칙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으며, 환경 보호를 위한 수많은 실천을 이끌어냈고, 우리 모두가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이중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도록 가르쳤다”고 말했다. 교회는 매년 찬미받으소서 주간(5월 24~31일)을 지내며 기후 위기의 절박한 상황에 직면한 인류, 그리고 공동의 집 지구의 모든 피조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별히 한국교회는 2020년 주교회의 특별사목교서 '울부짖는 우리 어머니 지구 앞에서’를 발표하고, 이듬해 5월 24일부터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을 통해 생태 환경 보호에 적극 나서고 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생태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성장을 최우선시하면서 무분별한 신공항 건설과 핵발전소 건립 등 기후 정의에 반하는 개발 정책에 치중해 왔다. 우리는 이미 기후 위기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이라도 삶의 태도와 방식을 획기적으로 전환한다면, 인류와 모든 피조물을 위협하는 이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하느님의 창조 질서 보존을 신앙적 소명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노력을 모범적으로 실천해야 한다.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3면

5월과 6월 사이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거세고 힘이 있다. 파란색과 빨간색의 차가 수시로 번갈아 지나가면서 우렁찬 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6월 3일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신들이 더 잘할 수 있다’라거나, ‘다른 편의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을 담은 높은 톤의 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그렇게 6월이 되면 더 좋은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커다란 경계선에 서 있는 느낌이다. 정치, 경제, 복지, 개헌, 교육, 주거, 노동, 일상생활, 문화와 미디어, 의료, 기후 환경, 과학기술, 외교, 통일과 국방, 공동체. 어느 하나도 뒤로 물릴 수 없을 중차대한 분야들에 대해 각계각층의 요구 또한 쌓여만 간다. 한편으로 저 많은 약속이 과연 물리적으로 지켜질 수 있을까 하는 우려도 켜켜이 쌓이고 있다. ‘하느님이 오셔도 안 되는 일’이라며, 미리부터 손사래를 치며 정치에 대한 포기를 선언하는 이도 종종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영역에 참여하는 일에 대해 많이도 언급하셨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이기에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되며, 참된 신앙은 언제나 세상을 바꾸고 가치를 전달하여 이 지구를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곳으로 물려주려는 간절한 열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늘 급진적이라고 오해받는 프란치스코 교황만 그런 말씀을 한 것이 아니다. 보수적이라고 오해받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도 당신의 첫 번째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에서,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의 정당한 몫을 받는 정의로운 사회 질서와 국가 질서의 건설은 모든 세대가 새롭게 받아들여야 할 가장 중대한 임무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임무로서 교회의 직접적인 책임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인간의 가장 중대한 임무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성의 정화와 윤리 교육을 통하여 정의의 요구를 이해하고 정치 영역에서 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자기 나름대로 이바지할 의무가 있습니다…”(28항) 라며 정치 참여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셨다. 이제 6월이 되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자리에는 새로운 권력이 자리한다. 한편에서는 기대가 차오르는 지금, “다른 모든 민족처럼 우리를 통치할 임금을 우리에게 세워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이스라엘 원로들에게 왕을 세우게 되면 당신들의 아들들을 데려다 병사로 삼고 일을 시키며, 딸들을 데려다 시중을 들게 할 것이요, 세금을 거두어 가고 종으로 부릴 것이라는 예언자 사무엘의 우려가 다시금 떠오른다. 이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정치하는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더 다가가야 한다. 당장 모든 것을 이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알지만 지난 겨울 광장에서 이 땅의 주인들이 목 놓아 부르짖었던 정의에 대한 갈망이 펼쳐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많은 숙제가 있지만 우선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창조물이 창조물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생명과 관계된 일들이다. 모든 창조물은 생명을 이어가야 한다. 생명을 저버리고 만들어낸 이상세계는 있을 수 없다. 눈앞의 이윤을 위해서 어느 한 생명이라도 저버리는 일이 생긴다면, 시작부터 누군가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이다. 눈물을 닦아주어도 시원치 않을 그 일꾼이 억울하고 핍박받는 이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억울한 사람, 억울한 소리가 제대로 들려 그 한을 풀어주는 일, 하늘 감옥에 갇힌 사람들이 땅으로 내려와 일터와 쉼터로 돌아가는 것, 안전이 보장된 일터에서 일하고 쉼이 보장된 거처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것, 모두가 행복을 찾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 이루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요 소명이다. 글 _ 나승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서울대교구 제6 도봉-강북지구장)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3면

전해야 하는 본질

‘이분 신부님 맞아?’ 홍보 주일 특집을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속에는 눈길을 끄는 방법으로 선교하는 ‘인플루언서’ 신부가 여럿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본인의 재능을 적극 활용하는 신부들의 콘텐츠를 찾다 보니, 그 매력에 빠져들어 늦은 밤까지 잠 못 든 날도 많았다. 여러 플랫폼에서 노래하고, 강연하며, 숏폼 콘텐츠를 만들고, 심지어 디제잉까지 하는 모습은 그동안 알고 있던 ‘사제’의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인플루언서 신부들의 선교 방법만큼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이 운영하는 SNS에 남은 이용자들의 다양한 반응이었다. 댓글 창에는 각기 다른 국가와 인종의 사람들이 남긴 진심 어린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인상적인 점은 출신과 배경은 달라도 모두 한 마음으로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멘”, “신부님의 말씀 덕에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졌어요. 사랑합니다.” 다양한 언어로 적힌 사랑의 말들은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바쁜 신부들을 섭외하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그 과정 자체로 즐거움과 배움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식이 이토록 다양하다는 사실도 새로웠다. 그러나 결국 본질은 전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그 자체였다. 서면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던 신부들이 입을 모아 강조한 것도, 그들의 SNS를 찾는 전 세계의 사람들이 공통으로 필요로 하는 것도 바로 그 ‘사랑’이었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장벽을 넘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미디어 사도직을 수행하는 기자는 그 사랑을 담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 홍보 주일을 맞아 그 사명을 다시금 마음에 새긴다.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3면

희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의 소명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전에 작성한 올해 홍보 주일 담화에서 오늘날 커뮤니케이션 환경의 위기를 진단하며, 그리스도인이 ‘희망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허위 정보와 감정적 선동, 그리고 디지털 기술에 의한 현실 인식의 왜곡은 사람들 사이의 공감과 연대를 해치고 있다. 교황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공격적 소통이 아닌 온유한 소통임을 분명히 한다.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은 종종 공포와 분노, 증오를 유발하고 있다. 디지털 미디어는 인간의 취향을 세분화하고 고립시키며, 관심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공동체 정신을 훼손한다. 그 속에서 “커뮤니케이션을 무장 해제시키자”는 교황의 요청은, 말과 정보가 다시금 치유와 희망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호소다. 교황은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닌 희망을 온유하게 나누십시오’(1베드 3,15-16 참조)라는 담화 주제 성구를 통해 희망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원했다.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에서 희망을 찾고, 이 희망에 대해 대답할 준비를 갖춰야 하며, 그 대답은 언제나 온유하고 존중하는 태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많은 뉴스 가운데 숨은 미담(美談)을 찾아내고 알리는 데에 힘쓰도록 격려했다. 교회는 대중 매체를 통해 효과적으로 교회의 사도직을 수행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는 SNS 등을 통해 모두가 미디어 사도로 활동할 수 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서 이웃을 기억하고, 이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사랑을 전하는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 그러한 커뮤니케이션이야말로 이 시대 그리스도인이 복음 안에서 희망을 전하는 길이다.

발행일 2025-06-01 제3444호 23면

‘진보’세요? 그래서요?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영원한 것은 오직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이다 ” 일찍이 칼 마르크스는 세상을 뒤바꾸어 놓은 그의 저서 「자본론」 맨 앞에 이 구절을 상재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이 구절은 뜻밖에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마르크스를 추종하는 자들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이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뜻만 빼고 모든 것을 받아들여 이 구절까지-그러니까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까지- 박제해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이며 진보라고 우겼다. 보수라면 원래 있는 것들을 박제해도 더 할 말이 없지만, 진보도 이 정도 되면 진보 밀랍 인형이라도 할 말이 없다. 뭐 이상한 일도 아니다. 철학자 최진석은 ‘시대에 따라 도무지 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가 경험한 것만을 믿는 사람을 꼰대’라고 정의했다. 그는 말한다. 장자를 열심히 읽은 제자가 어느 날 그에게 와서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쓰신 「장자」를 정말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저도 장자처럼 살려고 결심했습니다” 하자, 이 철학자는 그에게 일갈을 가한다. “너는 헛공부를 했구나 장자는 너 자신으로 살라고 한 말인 것을, 기껏 장자를 읽고 장자처럼 산다는 말인가” 하고. “우리가 옛날에 정권에 대항해서 돌과 화염병을 던지던 시대에 감옥 같은 거 법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었지.” 나는 이런 꼰대의 출현을 나의 동기들에게서 지겹도록 보고 있다. 시대의 정신만 빼고 다 박제해버린 꼰대들 말이다. 한번은 신앙이 돈독하다는 어느 자매가 내게 다가와 “마리아 자매님, 저는 성경을 다섯 번이나 읽은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혼하면 하느님을 거스르는 거라고 했는데 잘 아시죠?” 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예, 자매님. 제 수많은 지난 날의 죄 중의 하나이지요. 다만 예수님께서 다시 세우신 새로운 계약, 즉 신약이란 간단히 요약하자면 – 제가 이해하기에 - 자구에 얽매이지 말고 하느님과 너의 이웃을 사랑해라, 아니었던가요?” 아직도 강연에 가면, “작가님은 진보인가요? 보수인가요?” 하고 묻는다. 나는 대체로 진보적인 사람이지만, 요즘은 대체 어디에 그 진보라는 것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백 년이 넘는 시간동안, 우리 역사는 지독한 수구 세력에 의해 모든 새로운 싹이 잘려 나간 아픈 시간을 가지고 있다. 동학부터 시작되었을 그 아픈 역사 때문에, 사실 우리나라에서 진보는 대개 옳았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나는 2018년 소설 「해리」 발간 당시 인터뷰에서, “당분간 우리의 싸움은 가짜 진보 사기꾼들과의 싸움”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예언 아닌 예언은 불행히도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떻게 저 수구 보수를 지지해? 난 진보야”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는 말한다. 김정은은 보수인가 진보인가? 시진핑은? 프랑스 혁명 후의 로베스피에르는? 루터는 분명 진보였다. 유명한 종교개혁 독재자 칼뱅도 말이다. 이 나라의 역사가 거대한 모퉁이를 돌고 있는 것을 나는 느낀다. 엄청난 파시즘의 악취도 감지되는 요즘, 나는 더 이상의 애타는 기도를 멈추고 오로지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했다. 한나 아렌트가 그랬다. “파시즘은 광기의 결과가 아니라, 생각을 멈춘 자들의 고립감과 외로움, 소외에 대한 공포 때문”이라고. 이 산골에서 스스로 고립되어 성무일도를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뇌를 선동꾼들에게 의탁하지 않겠다' 라고. 그리하여 절망하지 않을 용기를 청해본다. 아아, 주님께서 우리의 희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리라. 글 _ 공지영 마리아(소설가)

발행일 2025-05-25 제3443호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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