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 공감은 현실을 올바로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간추린 사회교리」 196항 단지 감정 공유하는 공감 넘어 대안 모색 위한 노력도 중요 올바른 공감 위해 필요한 것은 믿음 갖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이 신부: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요?
라파엘: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공감해 주는 게 필요해요! 마리아: 너무 중요해요. 공감하며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야고보: 공감은 필요한데, 합리적이어야 합니다. 율리오: 맞아요. 단순히 선심만 생각해선 안 돼요. 상대방을 약하게 하거든요. ■ 동반은 공감의 시작 가난한 지역을 방문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 끼 식사조차 챙기기 어렵고, 연로하고 아프신 분들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사제의 방문에 황송해하며 거듭 감사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방문을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분들과 오래 머물지도 못한 것이 미안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친한 신부님께서 “내가 몸이 아프다 보니, 아픈 사람들의 처지를 너무 잘 알게 된다”고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리고 “언제고 기회가 되면 환자분들과 함께하는 사목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고요. 절친이자 동료 사제이지만 저는 그 신부님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사목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제로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경과 교리에 대해 강의를 하고, 사목과 관련된 행사나 프로그램들을 주관하지만, 사목의 본질은 ‘함께함’, ‘동반’입니다. 그러한 동반에는 물리적 만남과 그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알려는 인식, 그의 처지를 살피고 공감하는 정서적 차원도 포함됩니다. ■ 노력해서 얻어야 할 공감 능력 이런 공감은 약자에 대한 배려부터, 가까운 사람에 대한 우정,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보편적 태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요청됩니다. 그런 공감을 개인과 사회를 위한 하나의 필수적인 능력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단순히 상대방과 같은 감정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그쳐서도 안 됩니다. 올바른 공감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현실을 올바로 식별할 수 있어야 하고, 선함과 평화, 생명을 추구하려는 의지가 요청됩니다. 따스한 마음과 겸손한 경청도 중요하지만 냉정한 판단과 대안 모색을 위한 합리적 노력도 중요합니다. 반대로 경계해야 할 것들도 있습니다. 환심을 사기 위한 감성적 담론, 쇼에 불과한 선심성 행동, 치적만을 따지는 자화자찬, 말과 행동이 다른 표리부동함 등입니다. 사회교리는 사회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자 사회를 대함에 있어 필요한 식별과 판단의 도구입니다. 하지만 이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돼야 합니다. 더 나은 사람이란 올바로 공감하는 사람이며,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모든 것을”(필리 4,13) 이맘때면 많은 신부님들이 정든 임지를 떠나 새로운 임지로 가십니다. 그런데 먼 외국의 어렵고 힘든 곳으로 가시는 선후배 사제들을 봅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음식이나 문화도 다르고 열악한 곳, 심지어 이방인이라 배척받을 수도 있는 그야말로 낮은 곳으로 갑니다. 가장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입니다. 익숙한 한국에서 편안하게 사제생활을 하는 저로서는 마음이 애잔합니다. 어떻게 그런 어려운 결정을 했는지 같은 사제이지만 너무나 대단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잖아요? 그런 예수님의 마음에 공감하고, 또 사랑하기에 가는 것이죠!” 그 고백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그분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고 기쁜지,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복음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엿봅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분들을 통해 하느님을 선명하게 체험하는 지혜와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용기, 적대자조차 사랑하는 힘을 봅니다. 그러므로 공감하기 어려워하고, 주저하는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로 믿음을 갖고 마음을 열어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응답함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인류와 하나가 되신 예수 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당신 백성의 나약함을 취하시고 그들과 함께 걸어가시며 그들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가 되게 해 주시는 분의 측량할 길 없는 초월적인 사랑의 생생한 징표를 언제나 깨달을 수 있다. 그분을 통하여 그분 덕분에, 사회생활도 그것이 아무리 모호하고 모순투성이라 하더라도 생명과 희망의 장소로 재발견될 수 있다. 거기에서 모든 이는 끊임없이 은총의 표지를 받고 더욱 고귀하고 더욱 참여적인 형태의 나눔으로 초대받고 있기 때문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96항)이주형 신부 (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