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⑭ 교만을 겸손으로 누르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
입력일 2021-07-06 수정일 2021-07-06 발행일 2021-07-11 제 325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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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절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시키는 ‘겸손’
겸손의 덕 보여준 ‘주님 탄생 예고’
교만의 죄 씻기 위한 주님의 기도
「신곡」서 전체 낭송되는 유일한 기도
둘레길마다 선언되는 진복팔단
마음이 가난한 자들의 행복 강조

윌리엄 블레이크, ‘바위에 새겨진 수태고지를 감상하는 단테’(1824-1827년).

연옥 안으로 들어간 시인들은 바위 사이를 기어올라 연옥 산 첫째 둘레길에 도착한다. 둘레길은 그 폭이 사람 몸길이의 3배 정도 되는 환도(環道)이다. 그 둘레길에 면한 산허리에 교만과는 반대되는 겸손의 모범을 보여주는 일화들이 하얀 대리석에 새겨져 있다. 이는 예수회 판토하(Pantoja) 신부가 1614년 북경에서 펴낸 「칠극(七克)」의 제1권 ‘교만은 겸손으로 누르다’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위대한 겸손의 덕을 보여주는 첫 번째는 ‘주님 탄생 예고(Annunciazione)’이다. 연옥 편에서 성모 마리아는 항상 모든 미덕의 선두에 서 있다. 성모 마리아의 위대한 겸손은 그녀의 천사 가브리엘에 대한 대답 안에 표현되어 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겸손한 응답은 낙원 추방 이후 단절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회복시킨다.

한편 단테는 교만의 죄인들이 바위를 등에 지고 있기에 허리를 구부린 채 우는 얼굴로 저편에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말한다.

오, 교만한 그리스도인들이여, 불쌍한

사람들이여, 마음의 눈이 병들었기에

그대들은 뒤로 가는 발걸음을 믿는데,

우리는 거침없이 정의의 심판을 향해

날아갈 천사 같은 나비가 되기 위해

태어난 벌레들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연옥 10, 121-126)

교만의 죄를 씻는 영혼들은 ‘주님의 기도’(마태 6,9-13)를 낭송한다. 제11곡 1행에서 21행까지 이어지는 이 확장된 ‘주님의 기도’는 7개의 삼행시로 이루어지는데, 숫자상으로는 연옥의 일곱 둘레길, 칠죄종, 그리고 칠죄종에 반대되는 일곱 미덕에 대응한다. 이 기도는 「신곡」에서 그 전부가 낭송되는 유일한 기도다. 연옥에서는 이처럼 성가와 더불어 염경(念經) 기도가 죄인들을 격려한다.

둘레길 땅바닥 위에도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교만이 벌 받는 모습이다. 여섯 쌍의 사례가 성경과 신화에서 취해진다.(제12곡 25-63행) 하느님에게 반역한 루치페로가 맨 처음에 나온다.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이다.(루카10,18) 겸손의 모범으로 성모 마리아가 첫 번째로 나오는 것처럼, 언제나 악덕의 첫 번째 사례로 나오는 것은 루치페로다.

단테가 그림들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사이, 시각은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정오를 지나고 있다. 연옥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강조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시간이다.

고개를 들어라. 이제 그렇게

생각에 잠겨 가기에는 시간이 없다

(연옥 12, 77-78)

이날이 다시는 오지 않음을 생각하라.

나는 시간을 허비하지 말라는 경고에

익숙해 있었으므로 그 문제에 대한

그분의 말씀은 모호하지 않았다

(연옥 12, 84-87)

만일 시간이 죽은 이들에게 그렇게 소중하다면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연옥 순례는 그러므로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잘 보낸’ 시간의 모델을 제공한다. 희생과 성사(聖事)로 변모한 시간, 전례의 시간은 축복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된다. 특히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중요하다. 그들의 형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연옥 영혼들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 그들이 뒤에 남기고 온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도 안에서 기억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천국행은 빨라진다. 연옥 영혼들도 뒤에 남은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을 바라본다. 하늘나라에서 함께 다시 만날 것을 선취하는 것이다.

겸손의 천사가 저편에서 나타나 날개를 펴 단테를 부른다. 천사는 시인들이 둘째 둘레길로 오르는 계단을 가리킨다. 그리고는 자신의 날개로 겸손해진 단테의 이마에서 P자 하나를 지워준다. 시인들이 그곳으로 몸을 돌리는 동안 ‘산상 설교’에 나오는 진복팔단(眞福八端)의 첫 번째인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라는 달콤한 노래가 들려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님의 산상 설교」(1,1,3)에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쭐대는 일 없이 겸손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교만한 자는 지상의 나라를 얻으려고 애를 쓰지만, 마음이 가난한 자는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기에 행복하다고 말한다. 진복팔단 하나하나는 순례자가 각 둘레길을 떠날 때마다 천사에 의해 선언된다.

전과 비교하여 한결 몸이 가벼워진 것을 이상하게 여긴 단테가 사부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사부는 천사가 P자 하나를 이마에서 지워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교만은 칠죄종 가운데서도 가장 무거운 죄인데, 판토하 신부가 말한 것처럼, 질투는 남을 잃게 하고 분노는 나를 잃게 하지만 교만은 하느님을 잃게 하는 대죄이기 때문이다.

김산춘 신부 (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