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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 (32)최양업과 깊은 우정 나눈 페롱 신부의 흔적이 남아 있는 산막골성지

민경화 기자
입력일 2022-08-16 수정일 2022-08-16 발행일 2022-08-21 제 3307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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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 지역 신자들 믿음터이자 페롱 신부 사목 거점
최양업과 각별한 사이였던 페롱 신부
산막골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아
신자들 사랑 받으면서 사목 열정 쏟아
신앙 선조들이 형벌 받았던 장소로
순교사적지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어

충청남도 서천군에 위치한 산막골 성지 전경.

전국 방방곡곡을 걸으며 신자들과 만났던 신부 최양업. 하느님에 대한 사랑만으로 버텨내기에 힘이 부치는 순간, 그에게 힘이 돼준 것은 조선의 신자들, 그리고 함께 사목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이었다.

1852~1857년 무렵 최양업과 함께 사목했던 서양 선교사는 6명 가량이다. 1854년 6월 18일에 선종한 장수 신부, 1857년 12월 20일 선종한 메스트르 신부를 제외하면, 1858년에는 베르뇌 주교, 다블뤼 주교, 푸르티에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페롱 신부가 최양업과 함께 사목했다. 이 중 6살 터울인 페롱 신부와 최양업의 관계는 각별했다. 페롱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던 산막골성지를 찾아 두 사람이 우정을 나눴던 흔적을 살펴본다.

■ 신자들 사랑받으며 조선에서 사목 열정 불태운 페롱 신부

1827년 프랑스 세즈에서 태어나 1850년 12월 21일에 사제품을 받은 페롱 신부는 1854년 파리 외방 전교회에 입회해 1년간 수련한 뒤 조선으로 향했다. 1856년 1월 23일 조선에 도착한 페롱 신부는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전교활동을 시작했다.

포교지역에 오랫동안 머무르면서 그곳의 언어와 풍습을 배워 포교활동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였던 페롱 신부는 낯선 조선의 풍습과 문화에 잘 적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양업의 서한에도 드러난다. 페롱 신부가 조선에 도착한지 2년 남짓 됐을 무렵 이미 단짝이 된 두 사람. 최양업은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학장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열다섯 번째 편지에서 “페롱 신부님은 지금 건강하게 잘 있습니다”라며 “신부님은 신자들한테 사랑도 아주 많이 받고 있습니다”라고 적는다.

그러나 박해의 위협은 페롱 신부를 피해가지 않았다. 1866년 병인박해로 많은 선교사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았던 페롱 신부는 잠시 조선을 떠난다.

이후 조선 재입국을 시도하던 그는 1868년 5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 일행과 동조해 남연군 묘를 파헤치는 덕산 굴총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도굴에는 실패했으나 이 사건으로 천주교인에 대한 박해가 다시 전국으로 확산됐다.

조현범 교수(토마스·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예술학)는 페롱 신부가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중국 조정의 중재를 통해 박해를 종식시키고자 했으나 중국 주재 프랑스 공사의 미온적인 태도에 실망, 조선 위정자 조상의 유골을 탈취하는 데 가담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페롱 신부.

■ 충남 서천 지역 순교자들과 페롱 신부 흔적 남아있는 산막골과 작은재

충청남도 서천군에 자리한 천방산 산막골(판교면 금덕리). 여느 교우촌과 마찬가지로 수풀이 우거지고 산세가 험준한 이곳은 서천 지역 신자들이 숨어들어 신앙공동체를 이루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페롱 신부의 사목 거점도 바로 산막골이었다. 페롱 신부는 1858년 9월 24일과 25일, 1859년 9월 27일 등 총 6통의 편지를 산막골에서 작성했다. 그동안 산막골 교우촌에 대해서는 경북 상주시 모동면 신흥 1리에 있는 산막골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페롱 신부의 집 주인이자 복사로 활동했던 황기원, 황천일 등이 거주했던 곳이 서천 산막동이었던 점 등으로 보아 페롱 신부가 사목 중심지로 삼고 여러 차례 서한을 작성한 곳은 서천 산막골(현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이 확실하다는 게 2010년 호남교회사연구소 서종태 박사가 발간한 「박해기 서천지역 천주교회사에 대한 연구」 자료집을 통해 밝혀졌다. 또한 황석두(루카) 성인 일가가 충청북도 연풍에서 이주해 와 1866년 병인박해가 있기 전 10여 년 동안 머물면서 참회와 보속의 삶을 살았던 곳이라는 것도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산막골은 페롱 신부뿐 아니라 다블뤼 주교의 사목 중심지이기도 했으며 순교자들이 형벌을 받은 장소로, 순교사적지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다.

특히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8번지의 천방산 기슭은 수암리의 독뫼공소 터와 판교면 금덕리의 작은재공소 터를 이어주는 고갯마루로, 이름 없이 살다간 숱한 신앙 선조들의 줄무덤이 있던 자리였다.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서천 지역 사목 중심지를 2010년 당시 대전교구 서천본당 주임 정성용(요한) 신부가 발굴, 독뫼공소와 작은재공소 터, 작은재 줄무덤 터에 기념비를 세워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다. 또한 산막골에는 예수님상을 중심으로 황석두 성인상과 돌제대, 십자가의 길 14처와 순례자를 위한 작은 쉼터를 마련했다.

서천본당(주임 박성준 세례자 요한 신부)은 두 순교사적지를 잇는 옛길 3.5㎞를 순례길로 복원하고 있고, 서천 지역 교회사에 대한 체계적 연구를 통해 순교사적지로 가꾸어 나갈 계획이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