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연중 제29주일-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입력일 2005-10-16 수정일 2005-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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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변과 탐욕의 악어 한마리’

악어의 눈물

나일강에는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잡아 먹어버리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는 악어이야기가 전해옵니다. 악어는 큰 먹이를 삼킬 때, 눈물샘이 눌려서 눈물이 새어나오는 것이지만 언뜻 보면 잡아먹히는 동물이 불쌍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긴 이야기입니다.

악어의 눈물은 거짓 눈물, 짐짓 꾸민 눈물, 술수를 뒤로 감춘 채 남을 속이려는 눈물을 상징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고대 이집트의 전설에서 유래된 ‘악어의 논법’이란 말도 있습니다. 어느 날 나일 강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를 악어가 잡아갔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자식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 때 악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아이를 돌려주겠는가. 안 돌려주겠는가?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있으면 아이를 돌려줄 것이다.” 물론 악어는 아이를 돌려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만약에 부모가 “돌려주겠지요” 하면 “틀렸어”하고 아이를 잡아먹을”’ 한다면 “돌려줄 생각이었는데” 하고 결국 잡아먹을 작정이었습니다.

‘악어논법’이란 자기 위주의 궤변입니다. 악어가 그런 문제를 낸 것은 아이를 잡아먹기 위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물론 악어가 잡아먹고 말 거라는 속셈을 눈치 채고 맞는 답을 할지라도 악어는 또 다른 궤변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행적을 본 사람들의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트집 잡고 비난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예수님의 행적이 마귀의 힘을 빌어 하는 소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악어처럼 자신의 속셈을 숨기고 위선과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마침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 앞에는 악어와 같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자신의 편견과 고집에 사로잡혀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하늘나라에 대한 신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짐짓 예수님을 칭찬하고 나섭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예수님께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악어의 논법 처럼 좀처럼 빠져 나가기 힘든 올가미 였습니다.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신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매국노라고 소문을 낼 것이고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대답하신다면 로마 정부에 고발할 구실을 만들 심산인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라는 말처럼 자신의 편의에 따라 이쪽저쪽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위선자들의 모습이 기세등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궤변에 휘말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 어려운 상황을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일깨우시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예수님께서는 인간 삶의 근본은 하느님이시므로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모든 것은 하느님께 귀속된다는 신앙의 원칙을 분명하게 밝혀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하느님의 뜻을 모든 것의 기준으로 살아가신 예수님께 터무니없는 악어의 논법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저도 가끔씩 악어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어쩔 수 없잖아…,’ ‘세상도 다그러는데…’ 하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로 주신 은총을 거부하고 내 욕심과 만족만을 쫓아 사는 모습을 보면 내 마음속에도 교묘한 궤변과 탐욕의 악어가 한 마리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과 삶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소중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선물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삶을 정성껏 살아가야 하는 까닭은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바치는 봉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세상의 욕심에 한발을 디디고, 하느님께 다른 발을 디디고서 자기중심적인 논리대로 적당히 신앙과 일상을 넘나드는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시는 영적 깨우침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에는 하느님이 계시며, 하느님의 뜻을 기준 삼아 사는 삶은 인간의 논리가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굳은 확신으로 전해진 복음’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김영수 신부 (전주 용머리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