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뜻대로 안 된다고 국민 위협…교회가 윤리적 판단 내려야 할 때”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즉시 비상계엄 해제를 의결하고, 윤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에 착수했다. 여당의 거부로 표결이 불성립해 국회의 탄핵소추안은 의결되지 않았고, 정국은 혼란에 빠져 있다. 현 상황을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비춰 어떻게 바라봐야 할 지를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 하성용(유스티노) 신부의 기고를 통해 알아본다.
계엄. 아직도 많은 국민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기억이고, 상처로 남아 있는 기억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 다시는 없을 줄 알았던 이 계엄이 2024년 12월 3일 우리나라에 다시 발동되었습니다. 요새 가짜뉴스가 하도 많으니까 처음에는 가짜뉴스인 줄 알았습니다.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소리라서요. 그런데 진짜였습니다. 진짜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황당함이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헌법에 계엄은 전시·사변 또는 국가비상사태에 선포할 수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2014년 12월 3일 밤 10시20분에 우리나라에 이런 일이 있었나요? 처음에는 아직 국민들에게 알리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대통령의 계엄선포 이유는 더욱 황당했습니다. 반대 세력의 준동 때문에, 국회의 거듭된 탄핵 소추 때문에, 관련된 예산의 전액 삭감 때문에 계엄을 선포한다는 것이 주요 요지였습니다. 이때부터 황당함은 걱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아~~ 공사를 구별하지 못하는구나’, ‘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초법적인 발상을 할 수 있겠구나.’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는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도 있고, 나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와 타협, 협상과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이 민주주의 시민의 상식입니다. 나와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고 해서 적으로 간주하고 더 이상의 대화와 타협, 협상과 양보가 무의미하다고 하는 순간 민주주의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우리 역사는 이런 과오를 많이 저질러 왔고, 그 끝은 항상 국민들의 저항과 독재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국회의 입법은 행정 절차를 통해서, 법원의 결정을 통해서, 그도 아니면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통해서 정당한 이의 제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저같은 평범한 소시민도 아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법을 전공했고, 검찰총장까지 역임한 대통령이 이 모든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한방에 헌법을 정지시키는 결정을 했다는 것이 걱정되었습니다. 대통령은 우리 같은 소시민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통령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절차를 무시하는 초법적인 발상을 한다면 어느 국민이 법을 지키려고 하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마지막 계엄은 1979년에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피살로 시작된 계엄은 전두환의 1980년 5월 18일 광주 민주화 항쟁에 대한 무력 진압과 그에 이은 대통령 취임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 이후 45년 동안 없었던 계엄을 평화로운 저녁에 대통령이 소환한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계엄선포였습니까? 누구를 지키기 위한 계엄선포였습니까? 대통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 보장이 최우선 과제여야 합니다. 이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나와 내 가족, 나와 내 편을 지키기 위해 계엄을 선포하라고 대통령에 뽑아준 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은 왕정 시대의 왕이 아닙니다. 아버지로부터 저절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라고 국민들이 선출해 준 것입니다.
이런 국민들의 뜻을 거스르는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대통령은 필요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이미 이런 대통령을 거부해 본 적이 있는 국민입니다. 불행한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많은 국민들이 바라왔습니다. 정치적인 유불리를 떠나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우리가 파면한다는 것은 국민 모두에게 큰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번 비상계엄 사태를 보면서 스스로 멈추지 못한다면 주권자인 국민이 멈추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한 번의 경험이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다짐이 된 것입니다.
국민과 야당은 탄핵으로 대통령의 직무를 정지시키고자 하고 있고, 여당과 정부는 준비해서 질서 있게 대통령을 퇴장시키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혼란과 격동의 시간이 아직 끝까지 않은 채 계속 반복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대화와 타협, 협상과 양보가 민주주의 기본 원리
공권력 행사하는 통치자는 사익 아닌 ‘공동선’의 봉사자
가톨릭교회 가르침도 국가보다 시민 우위에 둬
정치는 가장 고급스런 형태의 자선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와 정치인에게 무관심한 것은 공동선을 위한 덕행을 저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필요할 때에는 교회가 정치질서에 대해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246항)라고 밝힙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고통받는 이웃을 위해 교회는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복음의 기쁨」 49항). 이런 관점에서 정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침묵과 식별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용감하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공권력의 명령이 도덕 질서의 요구나 인간의 기본권 또는 복음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경우 국민들은 양심에 비추어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의무가 있습니다. 참된 민주주의는 단지 일련의 규범들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결과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의 존엄, 인권 존중, 정치 생활의 목적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에서 사용되는 민주주의란 말은 근원적으로 공공생활에 참여하는 권리와 의무를 뜻합니다. 따라서 국가의 공권력을 행사하는 통치자들은 개인의 사익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선을 위해서 봉사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선거를 통해 대통령과 의회를 구성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모든 시민이 공적 영역의 문제에 대해서 참여하고,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톨리교회의 사회교리는 국가보다 시민사회가 우위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국가는 시민사회와 시민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해야 합니다.
“공권력의 요구가 올바른 양심의 요구에 어긋날 때, 공권력에 복종하기를 거부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복종과 정치 공동체에 대한 복종이 다르다는 데서 정당성을 찾을 수 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2242항)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하기 때문입니다.(사도 5,29 참조) 정치 공동체 안에서 행사되는 인간의 권위인 공권력과 하느님의 권위는 분명히 구분되며,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마태 22,21).
글 _ 하성용 유스티노 신부(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