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저를 보내주십시오] 살레시오회 왕요셉 신부(상)

박효주
입력일 2024-12-04 수정일 2024-12-10 발행일 2024-12-15 제 3421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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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상흔 남은 한국·일본 파견돼 고아들 돌보며 공부와 기술 가르쳐
“전쟁이 남긴 가난 속에서도 환대하던 신자들 모습 잊을 수 없어”

살레시오회 왕요셉 신부(호세 마리아 비안코)는 수련기 시절 “다른 나라에 선교 가고 싶은 사람은 편지에 그 뜻을 담아 부모님의 서명을 받아오라”는 수련장 신부의 말에 편지를 쓰지만, 왕 신부의 아버지가 왕 신부는 멀리까지 가서 소임할 훌륭한 사람은 못 된다면서 서명을 거부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왕 신부는 겨우 서명을 받아 일본과 한국에 차례로 파견됐다. 고향 스페인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74년째 본의 아니게(?)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왕 신부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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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요셉 신부는 유년기 시절, 학교 운동장 옆 성당에 머물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부분을 묵상하며 성소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박효주 기자

살레시오회 학교에서 꽃 핀 성소

1930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왕요셉 신부는 10살부터 15살 때까지 마드리드에 있는 살레시오회 학교에 다녔다. 학교에서는 해마다 사순 시기 피정을 3일씩 했다. 그 기간엔 교과서를 안 가지고 다녔기에 왕 신부는 대신 교실에 있던 책들 중 한 권을 읽었다. 왕 신부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에 관한 성인전이었는데 그 내용이 마음에 온전히 다가왔다”고 소회했다. 책에서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1491~1556)는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그의 모든 꿈을 이룬 후 결국 죽음으로 끝날 것이라는 점을 일깨워줬다. 책은 마침내 두 성인이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고 증언하기 위해 예수회를 창립하게 된 이야기를 다뤘다.

“그날 이후 제 성소를 두고 기도했어요. 학교 운동장 옆 성당에 머물며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또 요한과 야고보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신 것을 묵상하며 저에 대한 부르심을 느꼈죠.”

왕 신부는 자신이 직접 그린 수준급 그림을 보여줬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시는 장면이었다. 왕 신부는 감명을 받았던 그 광경을 떠올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주위 어른들의 말에 순명하겠다고 결심한 왕 신부에게 어른들은 새로 시작하는 가을 학기부터 수도회에서 지원자로 시작하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3년 후 18세에 입회해서 수련기 1년을 보낸 뒤 청빈·정결·순명 서원을 하면 좋겠다고 말을 건넸다. “그 말씀을 천천히 따르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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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요셉 신부가 예수님께서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 ‘나를 따라오너라’고 하신 장면이라며 직접 그린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 박효주 기자

전쟁의 상흔을 어루만지다

왕 신부의 인생에서 전쟁은 그치지 않았다. 왕 신부와 살레시오회의 만남은 스페인 내전(1936~1939) 당시 왕 신부의 아버지가 집에 살레시오회 관구장 신부를 숨겨주면서 시작됐다. 왕 신부 아버지는 그때로선 큰 건물인 5층 건물의 경비였는데 전쟁의 한 세력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의 탄압을 피해 건물로 도망 온 신부에게 도움을 줬다. 그것이 인연이 돼 왕 신부는 살레시오회 학교를 다니게 됐고 입회까지 이어졌다. 10대 초반에도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중이었기에 전투기가 신문에 자주 나오는 걸 보고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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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요셉 신부는 “일본 선교사로 호명되자 너무 놀랍고 두렵기도 해서 하느님께 울면서 기도했다”고 말했다. 박효주 기자

왕 신부는 1949년 첫 서원을 한 뒤 다음 해에 전후(戰後)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은 일본으로 선교를 갔다. 수련기 때 63명의 수련자 중 절반이 선교사로 떠났는데 그중 네 명이 일본으로 파견된 것이다.

“일본 선교사로 제가 호명되자 너무 놀랍고 두렵기도 해서 그날 성당 가서 하느님께 ‘너무 기쁘지만 자신이 없으니 도와달라’며 울면서 기도했어요.”

일본의 상황은 심각했다. 고아들이 길거리에 돌아다녔고 집도 거의 무너져있었다. 살레시오회는 남학생들만 300~400명 정도 되는 고아원 대여섯 개를 운영했다. 수도회는 그곳에서 아이들에게 공부와 재봉·목공·농사 등의 기술을 가르쳤다.

왕 신부는 일본에 12년간 있으며 1959년 사제품을 받았고, 1962년 살레시오회에서 맡고 있던 한국의 서울 도림동본당으로 2년간 파견됐다. 공교롭게도 한국 또한 6·25전쟁을 치른 지 몇 년 안 된 때였다. 모두가 배고픈 시절이라 동네는 가난했기에 본당에서는 미군들이 가져온 옥수수 가루 등을 배급했다. 가난 속에서도 새로운 신부님이 왔다며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던 신자들을 왕 신부는 잊을 수 없다.

당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가 막 시작될 무렵이라 아직 라틴어로 미사가 봉헌되고 성사가 행해지던 때였다. 덕분에 왕 신부는 한국에 오자마자 언어를 몰라도 사목을 할 수 있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신자들이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로 한국어를 가르쳐줬고, 왕 신부는 혼자 성당 마루에 앉아 하루 종일 교리 문답 책을 읽으며 한국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발전이라는 무기, 선하게 다뤄야”

옛날에 비해 한국은 물질적으로 큰 발전을 했다. 그중에서도 디지털 혁명이 놀랍다. 컴퓨터 등 전자기기의 이용은 편리하고 여러 작업에 도움을 주지만 동시에 여러 유혹이 되고 안 좋은 일의 도구로도 쓰이기에 조심해야 한다. 세상이 발전하고 발달할수록 선함을 지키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많이 멀어진 것 같다고 느낀다.

왕 신부가 보기에 요즘은 특별히 어려운 시기다. “그럴수록 더욱 하느님께 매달려야 한다”는 왕 신부는 영성체와 성체조배를 추천했다. 또한 신자들이 주일에 미사를 드리고 서로 기쁨 속에 친교를 나누며 신앙을 실천하길 희망하며 덧붙였다.

“우리 모두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신앙을 길러가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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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1962년 8월 15일 서울 도림동본당에서 사목하던 왕요셉 신부(가운데)가 아이들과 연을 날리고 있다. (오른쪽)1963년 8월 13일 구로동공소에서 왕요셉 신부(앞줄 가운데 왼쪽)가 영세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왕요셉 신부 제공

박효주 기자 phj@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