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플라스틱 협약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 개최 환경단체, 협약지지 측이자 개최국인 한국 유보적 태도 비판 “산유국 세력에 굴복한 것”
유엔 플라스틱 협약 성안을 위한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 Intergovernmental Negotiation Committee)가 일주일간의 협상 끝에 12월 2일 종료됐다.
회의는 당초 계획했던 1일보다 하루 늦게 종료됐지만 성안 없이 추가 회의로 넘기기로 합의하며 막을 내렸다. 협상위를 이끈 루이스 바야스 발비디에소 의장은 “일부 문안에 대한 합의가 이뤄진 것은 고무적이지만, 소수의 쟁점이 완전한 합의를 이루는 것을 막고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경단체 관계자들은 “협상회의 개최국이었던 한국 정부가 생산 감축을 포함한 강력한 협약을 위한 적극 행보를 보이지 않았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플라스틱 협약, 산유국 반대로 성안 없이 마무리
11월 25일부터 12월 2일까지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플라스틱 협약 제5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는 앞선 4번의 회의에서 논의한 내용들을 바탕으로 협약 작업을 완료할 것으로 기대를 모은 자리였다. 하지만 만장일치로 의사를 결정하는 특성상 안건에 대한 일부 국가들의 반대로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이번 회의의 쟁점은 ‘플라스틱 또는 1차 플라스틱 폴리머(화석연료에서 추출한 플라스틱 원료) 생산 규제’와 ‘유해 플라스틱·화학물질 퇴출’, ‘협약 이행을 위한 재원 마련 방안’ 등 세 가지였다. 최대 플라스틱 생산국인 중국이 예상보다 전향적 입장을 보였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산유국이 플라스틱 생산 규제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플라스틱은 원유부터 시작해 1차 원료인 폴리머 생산과정, 최종 제품이 소비돼 폐기될 때까지 전 생애주기에 걸쳐 오염을 일으킨다. 이 때문에 강력한 협약을 원하는 쪽은 ‘1차 폴리머 생산 감축’을 협약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산유국이나 플라스틱 생산국들은 이를 반대해 왔다. 이번 회의를 열 때 의장이 제시한 초안에는 “플라스틱의 전 생애주기 동안 지속가능한 수준의 플라스틱 생산 및 소비를 달성하기 위해 1차 폴리머의 공급을 관리할 필요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담겼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협약에 생산 규제 조항을 포함하는 것을 ‘레드라인’(한계선)으로 규정하고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러시아는 모든 국가가 수용할 수 있는 조항에 집중하자는 논리를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플라스틱은 2019년 기준 4억6000만 톤 이상 생산된다. 1950년대부터 생산된 플라스틱을 모두 합치면 90억 톤이 넘는다. 재활용률은 9% 정도다. 지금껏 생산된 플라스틱의 99%는 화석연료에서 추출한 화학물질로 만들어졌다. 화학물질의 종류는 수천 가지 이상이며, 이중 상당수는 인간과 자연에 유해한 물질이다. 해양에 투기되고 매립, 소각되는 플라스틱 폐기물이 바다와 땅을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회의 참가국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이지만, 경제적인 문제와 맞물려 협상을 어렵게 만든 것이다.
발비디에소 의장은 “쟁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추후 5차 협상위를 재개해 협상을 마무리 짓기로 전반적인 합의가 이뤄졌다”고 전했다.
또 “부산에서 플라스틱 오염을 종식하기 위한 많은 진전이 이뤄졌다”며 “우리의 일이 완료되기까지 한참 남았기에 공동의 목표를 향해 계속 협력하면서 실용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플라스틱 원료 ‘폴리머’ 규제
협약 조항 초안에 넣었지만
원료 생산 산유국 거부로 ‘불발’
회의 재개 약속하고 종료
환경단체 “플라스틱 오염 종식 끝까지 요구할 것”
플라스틱 위기를 막을 수 있는 전 세계적 약속이 성사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협상에 이르지 못한 것에 대해 환경단체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그린피스 플라스틱 캠페인 리더 그레이엄 포브스는 “각국 정부 대표단은 다음 회의에서 플라스틱 생산 감축을 위한 법적 구속력이 있는 국제 목표와 실질적인 조치를 포함한 효과적인 협약을 도출해야 하며 유해 화학 물질로부터의 보호,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 금지, 재사용 목표 설정, 공정한 재정 계획 마련 등도 핵심 과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를 실현하기 위해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는 협상 과정에서 참관인을 배제하는 관행을 중단하고, 플라스틱 오염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지역사회의 목소리를 최우선으로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개최국으로서 협약에 대한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은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김나라 그린피스 플라스틱 캠페이너는 “이번 회의에서 한국 정부는 강력한 협약을 지지하는 우호국 연합(High Ambition Coalition, HAC)의 소속 국가이자 협상회의 개최국이었음에도 생산 감축을 포함해 협약을 위한 적극적 행보를 일체 보이지 않았다”며 “한국 정부는 다음 회의에서 협약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강력한 국제 플라스틱 협약이 성안되도록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운동연합도 12월 2일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번 회의 결과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플라스틱 생산 규제를 강력히 거부한 세력에 굴복한 것”이라며 “아직 우리에게는 한 번의 협상이 남아 있기에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해 우리는 끝까지 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 정부 간 협상위원회(INC, Intergovernmental Negotiation Committee)
세계 여러 국가들은 종종 유엔에서 특정 문제에 관한 조약과 협정에 서명하는데 이를 통해 해당 국가는 해당 조약과 협정을 따라야 하는 법적 구속력이 생긴다. 따라서 유엔은 정부 간 협상위원회를 구성해 플라스틱 협약의 세부 내용을 협의할 수 있다.
정부 간 협상위원회는 정부관리들, 비정부기구, 과학자, 산업계 대표들로 구성돼 있으며 주요 청소년, 청년 그룹이 참관 자격으로 참여할 수 있다. 정부 간 협상위원회에서 최종 협약안이 마련되면 국가들이 여기에 서명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협약 최종안을 만들고 투표를 통해 협약으로 채택된다. 국가별 서명과 비준 절차가 완료되고 협정이 발효되면 서명국은 이 협약을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플라스틱 협약 제1차 정부 간 협상위원회는 2022년 11월 28일 우루과이에서 처음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전 세계 플라스틱 오염 현황을 공유하고 협약의 틀을 설정했다. 이후 2023년 5월과 11월에 각각 프랑스 파리와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뒤 지난 4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렸던 4번째 회의에서는 플라스틱 생산량 40% 줄이기 위한 목표를 제안했으며, 부산에서 열리는 5차 회의를 위한 ‘1차 플라스틱 폴리머에 대한 선언’을 공유했다.
민경화 기자 mk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