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 10,23-27 마태 19,23-26 루카 18,24-27)
‘재물을 많이 가진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부자청년이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난 다음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부한 일이 예수님을 슬프게 하였다. 그래서 ‘제자들을 둘러보시며’ 재물과 천국입국은 서로 상치된다는 교훈의 말씀을 하시도록 유발하였다. 예수께서 주위를 둘러보시고 말씀 하실 때는(마르 3,34. 루카 6,10) 세속적인 사람들 또는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예수님을 중심으로 서있는 ‘따르는 자들’ 즉 제자들을 보고 말씀하실 때이다. 그러니 이 표현은 세속 속에 사는 교회를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표현을 두 번씩이나 되풀이 하는 것은 이 점을 강조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점을 더 강조하면서 충격적인 예를 드셨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표현대로라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제자들도 그렇게 알아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 번 놀랐다. 깜짝 놀라서 “그렇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없겠네요”라고 말하였다.
부에 대한 일연의 말씀에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그 어느 것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우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예수를 따름과 하늘나라에 들어감과 구원받음은 꼭같은 뜻으로 쓰였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사실 부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며 재물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하여 마련된 필수 요건이기도 하다. 유대아인들은 부자가 되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였고 반대로 가난은 죄의 값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니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는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전통적인 통념을 뒤엎는 낙타와 바늘귀의 격언으로 가난한 자, 축복받은 자, 부자, 저주받은 자의 공식을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물질적 부가 하느님의 창조적 축복이라는 창세기의 본뜻을 예수께서 뒤엎으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축복은 어디까지나 생명 유지라는 지상 과제수행과 남과 더불어 함께 가지는 이웃 사람을 위한 것일 때 축복일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모든 것보다도 부에 대한 애착 때문에 주님께 대한 애착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는 부자는 악덕부자를 의미할 수밖에 없다.
낙타와 바늘귀의 격언을 문학적인 해석에서 이해한다면 유대아인들의 과장법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부 속에도 도사린 위험을 경고하는 대목은 구약성서에도 여러 번 나온다(시편 62,11: 잠언 15,16-17: 집회 31,3-11). 율법학자 라삐들은 상대방을 욕할 때 “너는 코끼리를 바늘귀로 통과시키려는 놈이다”라고 했다. 성서학자들은 낙타와 바늘귀의 이야기를 현실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바늘귀’는 예루살렘에 있는 가장 좁은 문의 이름이라는 주석을 하기도 하고 ‘낙타’라는 그리스 원문 ‘Kamclos’를 밧줄이라는 말 ‘Kami-los’로 읽어야 한다는 설을 내 놓기도 하였다. 지금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도중이고 예루살렘과 새 예루살렘, 그리고 하늘나라를 동일시하며 가르치던 사도시대 교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실 대신 밧줄을 바늘귀에 꿰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의 어려움을 표현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하여튼 예수의 부에 대한 여러 차례의 말씀으로 보아 부에 대한 탐닉자는 하늘나라의 부적격자임에 틀림없다. 사실 부가 하늘나라와 걸맞지 않는다면 천국의 장애요소는 부 뿐이 아니고 우리가 매일 범하는 죄 모두이다. 그러니 사람이 제 공로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려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다” 인간은 일을 불가능하게 망가뜨리고 하느님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든다(창세 18,14: 욥 42,2: 즈가 8,6).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는 ‘어떤 부자가 구원될 것인가’라는 설교에서 나누어 가질 것과 부자라고 해서 더 많은 권리를 주장하지 말 것을 가르쳤다. 그리스의 도학자 스토아학파는 부를 경멸하면서 제 소유물을 바다에 던졌지만 예수의 제자들은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