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기획/특집

인천 주안5동본당 부설 야학 한길고등학교를 가다

박민규 기자
입력일 2021-09-28 수정일 2021-09-29 발행일 2021-10-03 제 3263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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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잡은 연필… “오늘도 ‘열공’하며 배움의 한 풀어요”
교사 출신 봉사자들 도움으로 어르신들에게 배움의 길 제공
2년 과정 비인가 학교지만 검정고시 볼 수 있도록 인도
동문회로 선후배 유대도 깊어

마음과 열정에도 나이가 있을까. 공부하는 시기를 놓쳐버린 어르신들이 학생 신분으로 돌아가 다시 연필을 잡았다.

노인의 날(10월 2일)을 맞아 인천교구 주안5동본당(주임 김태헌 신부) 부설 야간학교 ‘한길고등학교’(교장 김태헌 신부, 이하 학교)를 찾았다. 이곳에 가면 배움에 대한 어르신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다. 부엌칼과 행주 대신 연필을 잡은 만학도들. 배움에 대한 이들의 간절함과 열정을 따라가 본다.

■ 무지개를 찾아서

‘무지개를 보고 싶다면, 비를 견뎌내야 한다.’(The way I see it, if you want the rainbow, you gotta put up with the rain)

“우리 각자의 무지개는 무엇일까요?”

수업 내용을 열심히 필기하고 있는 한 학생의 영어 노트.

집에서 손주들 재롱을 보고 온 어르신들이 교실에서 영어 숙어를 배우며 각자의 무지개를 생각하고 있다. 어려운 영어 단어지만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공책에 옮겨 적는다.

2학년에 재학 중인 윤수태(72)씨는 “영어는 가장 어려운 과목 중 하나지만 열심히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조금씩 익히고 있다”고 말했다.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초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윤씨의 마음 한구석엔 늘 배움의 갈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윤씨는 신자는 아니지만 자원봉사를 하며 인연을 맺은 지인의 소개로 주안5동성당에 자리잡은 한길고등학교에 입학해 자신의 무지개를 찾아가는 중이다.

바로 옆 교실에서는 1학년이 과학 수업에 한창이다.

“우리 몸에서 신장은 어디에 있을까요? 나눠드린 종이에 적어 보세요.”

선생님의 한 마디에 학생들은 서로 묻고 대답하며 답을 적는다. 최고령자로 올해 입학한 김복선(세실리아·82)씨는 “나이가 많아 체력적으로는 힘들지만 학우들과 선생님들의 배려로 평생의 꿈을 실현하고 있다”고 밝혔다. 선교사로 일생을 살아온 김씨는 지난해에 남편을 여의고 뒤늦게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 김씨는 “학교에서 하는 모든 것이 그저 재밌고 행복하다”며 수학의 기쁨을 나눴다.

■ 꿋꿋하게 바르게 참되게

‘꿋꿋하게 바르게 참되게’라는 교훈을 가진 한길고등학교는 1987년 호인수 신부(인천교구 원로사목자)가 주안 공단에서 일하는 여공들을 위해 설립했다. 배움에 목말라 있던 여공들을 교회가 포용한 것이다.

성당 지하에 교실을 만들고 학생들을 모집했다. 2년 과정의 학교는 1989년 제1회 졸업생 10명을 배출했다. 이후 학교는 꾸준히 학생들을 양성했고 2005년에는 졸업생이 25명까지 늘어났다. 현재는 1학년 5명, 2학년 9명이 재학하고 있다.

몸이 좋지 않거나 집안 사정 때문에 출석률이 높은 편은 아니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10대 못지않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주 5일을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두 과목씩 배운다. 방학도 있고 소풍, 수학여행도 다닌다. 여느 학교 과정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비인가 학교이기 때문에 졸업을 해도 학력 인정은 되지 않는다. 대신 검정고시를 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올해도 4월과 8월에 각각 2명이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방송통신대학에도 매년 1~2명씩 꾸준히 입학하고 있다. 동문회도 활성화돼 있어 선후배들 간 정도 두텁다.

어르신들의 학구열을 이끄는 데 교사들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곳 교사들은 무보수로 가르치며 봉사한다. 대부분 퇴직 교사들로 구성됐고 현직 교사도 있다. 교장 신부 포함 총 21명이 재직 중이다. 학생 수보다 교사 수가 더 많은 학교다. 이런 교사들의 헌신과 학생들의 간절함이 만나 대부분 졸업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교사와 학생 모두 만족도도 매우 높은 편이다.

인천교구 주안5동본당 부설 야학 한길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이 과학 수업을 듣고 있다.

한길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영어 수업을 듣고 있다.

■ 교사의 헌신과 학생의 간절함이 만나

“학생들을 통해서 저희가 훨씬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유정열(가리노) 교감은 “월급 받고 교사 생활을 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무보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순수한 봉사직에서 오는 기쁨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거기다 배움에 대한 학생들의 간절함이 더해져 교사들은 하나라도 더 전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유 교감은 “수업 분위기는 정말 환상적이다”며 “일반 학교에서 느낄 수 없는 행복을 이곳에서 만끽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정년퇴임하고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윤현상(클레멘스) 교사도 같은 마음을 전했다. 윤 교사는 “자녀들 다 출가시키고 이제 인생을 즐길 나이가 된 어르신들이 늦은 시간까지 학업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서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며 “현직에 있을 때보다 더 값진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김태헌 신부는 이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열정 하나로 순수한 봉사를 하고 있는 교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느끼고, 뒤늦게 배움의 열정을 꽃피우고 있는 어르신들에게도 감동을 받는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에게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계속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최근에는 인천 미추홀구청의 중재와 도움으로 인천에 기반을 둔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리모델링에 나섰다. 지하에 위치해 습하고 환기가 되지 않는 학교를 바닥, 천장, 벽 시공을 통해 쾌적한 환경으로 조성했다. 형광등 조명도 LED등으로 모두 교체했고 제습기와 냉난방기도 설치했다.

김 신부는 “조금이라도 좋은 환경이 조성된 만큼, 이곳에서 본인이 소망한 인생을 하느님 사랑 안에서 아름답게 펼쳤으면 한다”고 말했다.

오늘도 어르신들은 이른 저녁을 먹고 책과 필기구를 가방에 챙겨 배움의 기쁨을 향해 학교로 발걸음을 옮긴다.

박민규 기자 pmink@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