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게 이어진 작가의 길
저는 다섯 자매 중 막내예요. 아버지께서는 저희 자매들에게 예술 교육을 시키는데, 큰 언니와 둘째 언니는 피아노를 공부했고, 넷째 언니는 클라리넷을 전공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있었대요. 그래서 부모님께서는 제게 미술 공부를 시키셨어요. 처음엔 당연히 그림을 그렸어요. 따라 그리는 ‘재현’을 참 잘했어요. 상도 많이 받았고요. 자연스럽게 예술 중학교와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또 미대를 갔고요. 당연히 해야 하는 줄 알고 대학원도 갔고요.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미술의 길을 갔기 때문에 다른 길에 대해서는 잘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대학 때 조소를 전공했는데요. 그림을 잘 그리긴 했지만, 입체는 좀 어렵더라고요. 대학에서는 조금 어려운 분야를 전공하고 ‘그림은 언제든지 그리고 싶을 때 하면 되지’라는 마음이었어요. 사실 흙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매력이 있었어요. 저와 같은 여자들도 쉽게 입체를 표현할 수 있어요. 게다가 초벌인 900℃까지 구운 흙은 다시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어요. 친환경적인 소재인 거죠. 고등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께서 제게 특별히 테라코라를 할 기회를 주셨어요. 한 번은 제 자화상을 하나 만들었는데, 선생님께서 제게 ‘손맛이 좋네’라고 칭찬을 하셨어요. 그런지 몰라도 흙에 대한 친근함이 있어서 조소를 하게 됐죠.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어요. 남편은 NGO에서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인데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이라 돈을 버는 일은 열심히 하지 않았어요.(웃음) 그래서 제가 돈을 벌어야 했어요. 작업도 하고 싶은데 돈은 벌어야 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요. 힘든 시기였어요. 미술학원도 운영하며 입시 미술을 지도했어요. 손재주가 있어서 그런가, 아이들 가르치는 걸 잘했어요. 아이들 대학도 많이 보내고요.
아픈 어머니께서 성미술 작가로 이끌어
사실 성미술 작업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제가 30대 중반쯤, 어머니께서 위암 4기 판정을 받았어요. 위 절제 수술을 받은 어머니를 제가 모시고 살았어요. 작업은 계속하고 싶은데, 어머니를 돌봐야 하니 할 수 없었죠. 그렇게 갑갑하게 지내고 있는데, 한번은 서울 구파발 쪽에 꽃을 사러 갔다가 근처 석재상에서 까만 묘석을 얻어 왔어요. 그 묘석으로 십자가의 길 중 14처를 한 번 만들어 봤어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무덤에 묻히시는 부분이죠.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산소에 둘 생각이었어요. 예수님께서 아이처럼 엎드려서 누워 계신 모습으로요. 까만 표면의 묘지석을 정으로 파내면 안에 희게 표현되는 형태였어요. 누군가는 판화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요, 일종의 얇은 부조라고 봐야죠.
다행히도 어머니는 항암치료를 마치시고 건강도 좋아지셨어요. 그런데, 그때 십자가의 길을 만들던 기억이 너무 좋았어요. 지금도 작업할 때 마당에서 맡았던 아카시아 꽃향기가 느껴질 정도예요. 어머니의 건강이 어느 정도 좋아진 후 다시 학교에 나가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옆자리 선생님의 작업실에서 돌을 자르고 평평하게 연마하는 것부터 1년 반 정도 돌을 다루는 것을 배웠어요. 그렇게 십자가의 길 14개 처를 쭉 만들었어요. 나중에 부모님 돌아가시면 산소에 빙 둘러 설치할 생각이었죠.
같은 기법으로 조금 작게 만들었는데, 이게 의정부교구 행신2동성당 성체조배실에 가게 됐어요. 같은 콘셉트로 4개의 십자가의 길을 만들었는데, 서울대교구 중견사제연수원과 의정부교구 행신2동성당, 제가 다니는 수원교구 신둔성당, 수원교구 영성교육원에 설치돼 있어요. 지난해 영성교육원 작품을 만들고 나서는 어깨에 무리가 왔어요. 진동이 많은 무거운 작업 도구를 써야 하거든요. 그래도 제 작품을 보고 감동하고 우시는 모습을 보면 저의 일에 보람을 느껴요.
성미술 작품으로 복음화 이끌고 싶어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전업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작업을 해서 판 돈으로만 생활하기는 힘들잖아요? 그런데 저에게도 기회가 왔어요. 2009년에 가톨릭 미술 공모전이 처음 열렸어요. 그때 우수상을 받았어요. 저는 세상이 달라지는 줄 알았어요. 전업 작가를 할 수 있겠다고요. 같은 공모전에서 세 번 상을 받았지만, 제 삶은 변하지 않았어요.
돌 작업으로 십자가의 길도 만들지만, 흙으로 성모상도 자주 만들어요. 특히 수태고지를 주제로 한 작업을 많이 해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성모님의 모습이 너무 좋거든요. 게다가 성모상은 인기가 많아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거죠. 같은 주제로 그림도 그리고요.
처음 성미술을 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했어요. 그래서 바오로딸성경학교에서 6년 동안 성경을 공부했어요. 이후로는 그냥 성경을 읽을 때와는 다르게 에너지가 솟아 올랐어요. 지금은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전부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한때는 꾸르실료를 수료하기도 했어요. 저는 제 작업이 제 욕구를 충족하고 생활비를 버는 직업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를 꾸르실료에 보내신 분은 제 작품 활동이 ‘복음화’ 활동이라는 거예요. 전 그걸 깨닫지 못했어요. 제 작품이 누군가의 신앙을 불러일으키고 교감을 할 수 있는 매개체된다는 걸요.
성미술 작품 활동은 계속 이어지고 있어요. 누군가 광주대교구의 어느 주교님께 제가 만든 <착한 목자>상을 선물로 드렸데요. 그랬더니 이 작품을 맘에 들어 한 광주대교구청의 한 국장 신부님이 10년 교리교사 근속상 선물로 같은 작품을 여러 개 만들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또 이게 연결돼 광주대교구 문흥동성당 십자고상을 만들어달라는 의뢰까지 이어졌어요.
사실 허리도 아프고 제 건강 상태가 작품을 맡을 상황은 아닌데요. 별 수 있나요? 작가로서 먹고살려면 작품을 만들어 내야지요. 그리고 계속해서 성미술을 하는 작가로 남고 싶어요.
◆ 한상희(루치아) 작가는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제1회 가톨릭 미술 공모전 우수상 등 같은 공모전에서 세 차례 수상했으며, 서울대교구 중견사제연수원, 수원교구 신둔성당, 의정부교구 행신2동성당, 대전교구 궁동성당 등에 십자가의 길과 십자고상 등을 봉헌했다. 홍익조각회와 서울가톨릭미술가회 회원이며, 선화예술고등학교에 출강하고 있다.
최용택 기자 johnchoi@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