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움 밝히는 촛불처럼 음악이 마음 밝혀주기를
많은 생각 떠오르는 한 해의 마지막
춥고 어둡게 보낼 수 있는 이 시기에
대림·성탄 지내며 희망 품을 수 있어
매일 짜인 시간에 따라 움직이다 보니 저희 같은 수도자들은 아마도 남들보다는 더 시간의 흐름에 더 민감한 것 같습니다. 같은 시간에 기도를 바쳐도 하루하루 성당에 들어오는 해의 길이가 달라지는 게 느껴지는데, 특히 하루의 마지막 일과인 끝기도를 하러 성당에 들어가기 전 침묵 중에 행렬 대열에 서서 어둡고 고요한 수도원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뭔지 모를 울적함이 마음 한 가운데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제 늦은 가을이라서, 그리고 또 한 해가 아무것도 해 놓은 것 없이 그냥 벌써 지나가 버린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때 아무 특별한 이벤트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정말 우울하게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행인 건,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성탄이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성탄을 앞두고 4주 동안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소망의 시기, 대림 시기가 있어서 우리가 이 우울한 시기를 희망을 간직한 채 보낼 수 있지 않나 합니다.
사실 연중 마지막 시기의 전례 때 사용되는 성경 말씀들과 기도문들이 전해주는 분위기는 12월 16일까지 대림 시기 첫째 부분의 말씀들이 전해주는 분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거의 11월 한 달 동안 낭독된 말씀들도 마지막 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대림 시기 첫째 부분 역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시기의 전례들이 종말이나 마지막 때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불확실한 미래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모두 더 그리스도인답게 충실하게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분명 대림 시기는 한 해의 마지막 때, 밤이 길어지는 어둡고 우울한 때를 따뜻하고 희망찬 분위기로 바꾸어 줍니다. 매주 하나의 촛불을 더하는 대림초는 우리의 희망이 점차 커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독일어권 지역에서만 있는 전통인지는 모르겠는데, 독일 지역에서는 보통 대림 첫 번째 시기에 매주 한 번씩 ‘로라테 미사’를 거행합니다. 본래는 ‘로라테’(Rorate)가 대림 제4주일 입당송이기도 하고, 그만큼 성모 마리아와 관련되어 있어 대림 두 번째 시기에 거행하던 성모 신심 미사였습니다. 하지만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의 대림 두 번째 시기에는 매일매일 아기 예수님 탄생을 준비하는 고유한 말씀이 준비되어 있는데, 로라테 미사가 이 말씀의 흐름을 해칠 수 있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이루어진 전례 개혁으로 로라테 미사는 성모 신심 미사보다는 대림 첫 번째 시기에 거행할 수 있는 미사로 성격이 바뀌었습니다.
이 미사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캄캄한 어두움 속의 빛’입니다. 보통 새벽 미사로 바치는데, 성당에는 어떤 인공적인 불빛도 밝히지를 않습니다.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 어두운 성당에는 오직 촛불만 켭니다. 본당마다, 수도회마다 촛불도 다르게 켰었습니다. 신자들 모두가 하나씩 자기 촛불을 들고서 미사에 참례한 곳도 있었고, 아주 캄캄한 가운데 제대 위에 하나의 촛불만 켜놓고 미사를 거행한 곳도 있었습니다. 하나의 촛불만 켜놓은 곳에서는 동료 사제들이 많았어도, 이날만은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이 모두 뒤섞여 앉았고, 주례사제 한 명만 미사를 거행했었습니다. 촛불 하나에 의지해 추위에 덜덜 떨면서 바치던 미사가 끝날 때가 되면 아침 해가 떠오를 즈음이 됩니다. 그렇게 작은 촛불에 의지해 기다리다 보면 밝고 환한 태양이 떠오른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게다가 어떤 곳에서는 이 미사에 참례한 모든 신자를 위해 아침 식사를 제공하기까지 합니다. 희망을 품고 어두움을 함께 지나온 분들이 함께 어우러져 따뜻한 식당에서 즐거운 아침 식사를 나누는 모습이 우리가 바라는 목표가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이런 로라테 미사가 보여주는 모습처럼, 이 대림 시기는 한편으로 아주 차분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물론 다른 한편으로는 대림 시장 혹은 성탄 시장으로 인해 유쾌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보여주기도 하지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 가운데 ‘오르겔뷔흘라인’(Orgelbüchlein) 이 있습니다. 독일어로 ‘-라인’(-lein)이 붙으면 ‘작다’는 의미를 지니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오르간 소곡집’으로 번역되어, 자칫 초심자가 연주하기 적당한 곡으로 오해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작다’는 것은 사실 인쇄되는 책 크기가 작아서 그런 건데, 미완성으로 끝난 이 악보집은 바흐가 전례주년에 맞추어 선정한 코랄들에 전주곡 내지 묵상 곡을 한 페이지나 두 페이지 정도로 아주 짜임새 있게 미리 계획하고 채워나간 악보집입니다. 그래서 아주 완성도가 높은데, 가끔 계획에 어긋나 제한된 페이지를 넘길 것 같으면 타블라투어(Tablatur)라고 하는 방식으로 페이지 여백에다 곡을 채워 넣기도 합니다.
타블라투어는 바흐 시대까지 어느 정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악보 기록법으로, 시대와 지역, 작곡자 개인마다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쉽게 말해서 현대 기타의 타브 악보와 비슷하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이 악보집은 바흐의 숫자 기법이라던가 여러 신학적 암시도 들어있고, 음악적으로도 칸타타에 사용된 여러 음악 어법들이 모두 들어있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바흐 오르간곡을 해석하는 데 대가 중 한 분인 빈의 미햐엘 라둘레스쿠(Michael Radulescu)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 번은 이분이 며칠간 오르겔뷔흘라인만 놓고 마스터클래스를 했습니다. 현대 출판본에는 여전히 오류들이 많아 주로 필사본을 보면서 진행했는데, 한 곡 한 곡마다 관련된 성경과 신학, 아우구스티누스의 시편 해설을 놓고 숨겨져 있는 숫자나 상징, 음악언어 등을 설명해 주셨고, 칸타타나 다른 오르간곡과 연결해 주셔서 저에게는 마치 피정과 같았던 마스터클래스였습니다.
그 가운데 첫 곡 ‘이제 오소서, 이방인의 구세주여’(Nun komm, der Heiden Heildand, BWV 599)를 설명하시면서는 아직 바흐 시대까지 익숙했을 고딕이나 르네상스 오르간 전통을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이 오르간들은 소리의 음량을 조절하는 역할을 했던 오르간 전면부 여닫이문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대림이나 사순 시기가 되면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오르간 여닫이문을 닫고 이 곡의, 아니 이 악보집의 첫 시작을 아르페지오 방식으로 연주하면, 이 악기가 쳄발로였다면 짧은 꾸밈음 같은 첫 반음들이 뒤에 오는 긴 음을 강조하기 위해 띄어 연주하게 되었을 텐데, 오르간인 덕분에 가급적 부드럽게 붙여 연주할 수 있기도 하고 닫은 문이 그 효과를 둥그렇게 내게 도와준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katabasis) 주님을 마치 노래하듯 또 마치 아기를 어르고 달래듯 포근하게 받아넘기는 분위기를 내게 됩니다.
이제 대림 첫 번째 촛불이 어두움을 밝힙니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어둡고 답답한 이때, 문을 닫고 하는 대림 시기 음악이 하나의 촛불이 되어 마음의 문을 열고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묵시 3,20)하신 주님께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소망의 음악이 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