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기쁨을 주는 일’이란 주제를 화면에 띄워 놓고 멍하니 바라본다. 기쁨이라⋯. 기쁨이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 본다. 아스라이, 학부 시절 은사님께서 해주셨던 ‘joy’와 ‘pleasure’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다. “배고픈 사람에게 짜장면 한 그릇을 주면 기쁘게 먹는다. 두 그릇까지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세 그릇, 네 그릇 계속 주다 보면 그때부터는 먹는 게 기쁨이 아니라 공포가 된다. 이게 pleasure다. 그런데 책을 읽는 기쁨을 생각해 봐라. 한 권을 읽어도 백 권을 읽어도 그 기쁨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게 joy다. 너희가 말 배우고 문학 배우는 애들이거든 joy와 pleasure는 꼭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벌써 15년도 더 전에 들은, 선생님은 그저 우리가 먹고 노는 것보다는 읽는 것을 선택하길 바라며 해주신 이야기이지만, 그날 이후로 내가 뭔가를 결정하는 데 있어 기준점이 된 참 소중한 이야기이다. 금세 질릴 pleasure가 아닌 언제고 남아 있을 joy를 좇는 것, 그건 예수님을 좇는 일뿐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일에 해당할 테니 말이다.
요즘 내가 느끼는 즐거움은 joy일까 pleasure일까. 부끄럽게도 내 생활은 joy보다는 pleasure에 더 빠져 있는 것 같다. 맛있는 음식을 배달시켜 먹고, 보고 싶던 영화나 드라마를 보기도 하고. 물론 시간기도도 드리고 성체조배도 하지만, 기도 생활 틈틈이 여가를 쓰는 게 아니라 여가생활 틈틈이 기도를 끼워 넣는 듯한, 중심축이 흔들린 느낌이다.
사제이든 수도자이든 동양의 관점에서 보면 ‘출가’한 사람들이다. 단어의 음절이 반대일 뿐이지만, 출가와 가출은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번뇌에 얽매인 세속의 인연을 버리고 성자(聖者)의 수행 생활에 들어감’이란 의미라면, 후자는 ‘가정을 버리고 집을 나감’을 의미한다. 나는 분명 전자를 선택했는데, 지금의 내 삶은 후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어 맘이 살짝 아리다.
출가자로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joy는 사실 하느님을 찾는 것이어야 한다. 미국 예수회원인 제임스 마틴 신부가 쓴 책 제목처럼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고 삶이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모든 것 안에서 다른 것을 찾을 때가 있다. 언제는 하느님 대신 ‘돈’을 찾기도 하고, 언제는 ‘명예’를 찾기도 하고, 언제는 ‘권력’을 찾기도 한다. 나뿐 아니라 대부분의 필부필부가 이것을 좇고 찾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 무겁게 다가올 뿐이다. 하느님의 자리에 하느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놓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인식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것에 푹 빠져 있다는 것. 그것이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가슴 아프게 다가와야 할 현실일 것이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 참 꿈 같은 소리로 들리기도 하는 이 책의 제목이 내게 가슴 깊이 박힌 이유는, 아마도, 아니 분명히, 나의 이런 현실 때문일 것이다. 하느님이 좋다고 하느님과 함께 살겠다고 선택한 삶에서조차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좇으면서 매일 강론 시간에 입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 내 삶의 궤적이 피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나의 흠결에도 불구하고, 이런 나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를 당신의 이름(=그리스도)을 달고 사는 사람(=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시는 그분의 한량없는 사랑과 자비와 아량에 나는 그저 기댈 뿐이다. 내가 하늘을 째려보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마음새를 추스릴 수 있는 까닭은, 하느님의 이 한량없는 사랑과 자비와 아량 덕분일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지금 이 시간에, 다시 한번 다짐한다. 새로이 열어 주신 이번 한 주 동안은 열심히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을 찾겠노라”고.
글 _ 이종원 바오로 신부(의정부교구 동두천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