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사도 10,34ㄱ,37ㄴ-43 / 제2독서 콜로 3,1-4 / 복음 요한 20,1-9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모두가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합니다. 그런데, 부활을 전하는 복음서의 첫 이야기는 좀 이상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사람들이 놀라고 모두 환호하는, 그런 기쁨과 경탄이 드러나는 이야기가 아니고 아주 담담하게 ‘빈 무덤’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 그칩니다. 네 복음서 모두가 이를 공통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복음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부활의 감동과는 무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주간 첫날, 즉 유다인들의 안식일 다음 날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갑니다. 그런데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어서 놀라고 두려워서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알립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을 보고 놀라고 혼란스러웠으나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는 못했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로 부활에 대한 복음이 시작할까요?
가장 먼저 무덤으로 간 마리아 막달레나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충격이 사라지지 않았을 터인데 그녀는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갑니다. 어떤 마음에서 그녀는 이렇게 이른 시간에 무덤으로 발걸음을 향했을까요? 어쩌면 소리 내어 주검 앞에서 통곡하지 못해서 혹은 그리움에 눈물지으며 못다 한 이야기를 들려주러 갔을지도 모릅니다. 절망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을 잊지 않고 어둠이 채 가기도 전에 무덤으로 예수님을 찾아간 그녀는 누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존경한 제자입니다. 이런 진실한 사랑이 부활한 예수님을 가장 먼저 체험하게 하는 원동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처음 마주한 것은 텅 빈 무덤입니다. 당혹스럽습니다. 누가 선생님의 시신을 훔쳐 갔는지 두려움도 듭니다. 죽어서조차 선생님은 반대자들에게 표적이 되어 해코지당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녀는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갑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들 역시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큰 환호를 받으며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온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갑작스럽게 벌어진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하며 절망감에 빠져 있습니다. 또한 자신들도 죽을 수 있다는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마리아 막달레나가 외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무덤으로 뛰어가 보니 여인의 말처럼 무덤이 비어있습니다. 들어가 보니 시체가 그냥 없어진 것이 아니고 수건과 아마포가 개켜 놓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더욱 혼란에 빠집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고 복음은 이야기합니다.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고, 부활에 대한 첫 증언은 부활하신 예수를 목격한 것이 아니라 ‘빈 무덤’일까요?
제자들이 부활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십자가와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예수님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분의 죽음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유다인 대부분의 기대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따른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킬 정치적 지도자로 기대한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누가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툴 뿐 아니라(루카 22, 24) 제베데오 아들들의 어머니는 아들들의 좋은 자리를 미리 부탁합니다(마태 20, 20~21). 그렇게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이 정치적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통치할 것을 기대했으나 이런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예수님은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조차 하느님을 신뢰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으로 살면서 얼마나 하느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건이자 동시에 하느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기에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무력하게 우리의 죄와 어둠을 끌어안아 주시는 지를 보여준 사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살아간 사랑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분이 왜 십자가에 달리신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은 철저한 실패이며, 그 죽음과 함께 자신들의 기대와 욕망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들은 절망과 죽음 너머에 있는 예수님을 전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있어야 할 자리가 ‘죽음’이 아님을 말해줍니다. 그분의 인생이 제자들의 생각처럼 실패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살아간 사랑이 현실적 힘 앞에서 무력해 보이지만 끝내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또한 예수님의 새로운 초대입니다. 혼란과 두려움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삶이야말로 하느님이 원한 삶이고 하느님께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초대입니다.
우리는 ‘빈 무덤’을 묵상하면서 세상의 판단과 달리 결국 사랑이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건이 ‘예수님의 부활’임을 깨닫게 됩니다.
정호승 시인의 시 ‘봄길’이 떠오릅니다.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사랑이 실패했다고 느끼는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 가는 길이 있고, 그런 사랑의 길은 우리가 피해야 할 고통의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이 동반하는 따뜻한 봄길이라고 시인은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따뜻함을 우리 모두가 체험하고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글 _ 현재우 에드몬드(한국평단협 평신도사도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