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로 파파갈로 신부, 나치에 탄압받는 이들 돕다 총살 당해 노동자들 권익 위해 헌신…"가톨릭 사회교리 실천 모범"
80년 전인 1944년 3월 24일, 나치는 로마 남쪽 외곽 포세 아르데아티네에서 이탈리아 민간인 335명을 총살했다. 바로 전날, 이탈리아 레지스탕스가 독일군 33명을 죽인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희생자 중에는 당시 55살이던 피에트로 파파갈로 신부도 있었다. 파파갈로 신부는 그해 1월 유다인과 왕권주의자, 공산주의자, 지식인, 파시스트 반대자, 동성애자를 비롯해 나치가 억압하던 이들에게 거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나치 교도소에 구금됐다. 파파갈로 신부의 죽음이 특별한 이유는 그가 20세기 초에 탄생한 ‘가톨릭 사회교리’ 실천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이다.
파파갈로 신부는 1915년 4월 3일 사제품을 받았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 중이었지만, 발뒤꿈치에 문제가 있던 파파갈로 신부는 간신히 징집을 면했다. 그의 사제품 성구는 다음과 같은 베네딕토 15세 교황이 쓴 평화의 기도였다. “자비의 주님으로 인해 고통의 신음을 끝낼 수 있습니다. 평화의 주님으로 인해 평화를 갈망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이탈리아 남부의 가난한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북부로 이주했고 파파갈로 신부는 이들을 섬기고자 했다. 그는 1920년대 로마에 있는 치사 비스코사라는 큰 섬유회사의 기숙사 담당을 맡았다. 곧 파파갈로는 기숙사에서 지내는 노동자들이 회사로부터 혹사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회사는 수당을 주지 않고 야근을 시켰으며, 이를 거부하면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또 직원들에 대한 사회복지 혜택을 거부했고, 남부에서 온 노동자들을 차별했다. 노동자들은 독한 화학약품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파파갈로 신부는 바로 회사에 이의를 제기했다. 회사는 당시 기업가를 감싸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부에 이를 알렸고, 정부는 교황청의 한 관리에게 이를 전했다. 바로 훗날 비오 12세 교황의 측근이 됐던 페르디난도 발렐리 몬시뇰이었다. 발렐리 몬시뇰은 파파갈로 신부에게 신부는 노동조합 조직자가 아니라며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파파갈로 신부는 발델리 몬시뇰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썼다. “공장에서의 노동은 비인간적입니다. 공정하지 않습니다. 전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오직 신앙이고 인류애입니다. 제가 제 형제들을 무시하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하지만 발델리 몬시뇰은 파파갈로 신부를 기숙사 담당에서 물러나게 했지만 파파갈로 신부는 로마에 남았다. 그는 아기 예수 오블라티 수녀회 성사 담당 사제로 로마 성모대성당 인근의 한 아파트에서 지냈다. 파파갈로 신부는 자신의 아파트를 남부에서 북부로 이동하는 이주자들이 지낼 수 있도록 내어줬다. 수녀들을 설득해 수녀원 시설에서도 이들이 지낼 수 있도록 했다.
1943년 9월 나치가 로마를 점령하자, 파파갈로 신부는 나치의 탄압을 받는 이들에게 쉼터를 제공했다. 그의 아파트는 난민들로 가득했다. 파파갈로 신부는 인쇄소를 운영하는 조카들을 통해 이들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줬다.
결국 파파갈로 신부의 활동은 들통이 났고, 1944년 1월 29일 체포됐다. 그는 비아 타소에 있는 훗날 해방역사박물관이 된 게슈타포 교도소에 투옥됐다. 나치 친위대원이자 로마 경찰국장이던 헤르베르트 카플러의 파파갈로 신부를 고문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파파갈로 신부는 난민 지원 활동과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동료 수감자들은 파파갈로 신부가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음식과 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눴으며, 영적 아버지로 활동했다고 증언했다. 파파갈리 신부는 교도소 안에서도 성경을 가르치고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카플러는 총살자 명단에 파파갈로 신부의 이름도 넣었다. 총살장으로 가던 길에서 파파갈로 신부는 같이 가던 사람들에게 축복을 전하고 고해성사도 베풀었다. 총살장에서는 간신이 손을 묶고 있던 밧줄을 풀고 손을 높이 들어 동료들을 축복했으며 총살을 집행할 나치 군인들을 용서했다.
이탈리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파파갈로 신부에게 영감을 얻어 1945년 영화 ‘무방비 도시’(Roma città aperta)를 제작했다. 카를로 치암피 이탈리아 대통령은 1998년 파파갈로 신부에게 국민훈장을 추서하며 “파파갈로 신부는 신앙의 빛에 따라 불굴의 패기로 자신을 희생했다”고 치하했다. 2000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파파갈로 신부를 20세 순교자로 선언했고, 이스라엘 야스바쉠 박물관은 유다인을 구한 그의 공로를 높이 사 ‘열방의 의인’ 메달을 추서했다.
80년 전 한 이탈리아 사제는 당시 가톨릭교회의 사회의식에 따라 살며 자신을 희생했다. 나치는 그의 생명을 앗아갔지만 그의 신앙 유산은 없애지 못했다. 그의 신앙 유산은 사회교리 실천의 모범으로 남아 앞으로도 계속 전해질 것이다.
글 _ 존 알렌 주니어
교황청과 가톨릭교회 소식을 전하는 크럭스(Crux) 편집장이다. 교황청과 교회에 관한 베테랑 기자로, 그동안 9권의 책을 냈다. NCR의 바티칸 특파원으로 16년 동안 활동했으며 보스턴글로브와 뉴욕 타임스, CNN, NPR, 더 태블릿 등에 기사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