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

[순례, 걷고 기도하고] 청주교구 배티성지

이승환
입력일 2024-06-05 수정일 2024-06-11 발행일 2024-06-16 제 3397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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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하느님 만난’ 가경자 최양업 신부 사목 중심지

안성의 너른 평야를 지난 것이 불과 10여 분 전인데 어느새 깊은 산 속에 들었다. 일대 가장 깊은 산골짜기라 하더니 자동차로 오르는데도 만만치 않다. 가파른 오르막을 서너 차례 힘겹게 지나 고개 정상에 올랐다. 경기도 안성과 충북 진천을 잇는, 돌배나무가 많던 이 고개를 예로부터 배나무 고개, ‘배티’(이치, 梨峙)라 불렀다. 도로가 나기 전에는 첩첩산중이었던 고개 바로 아래 청주교구 배티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배티성지는 박해시기 교우촌이자 복자 오반지(바오로) 등 유명‧무명 순교자들의 묘를 모신 순례지다. 무엇보다 배티성지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염원하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다. 1849년 사제품을 받은 후 조선에 돌아온 최 신부는 1853년부터 3년간 이곳을 사목 중심지이자 본당으로 삼아 교우촌 순방에 나섰다.

“제가 담당하는 조선 5도에는 매우 험준한 조선의 알프스 산맥이 도처에 있습니다.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근접할 수 없는 깊은 골짜기마다 조금씩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사나흘 기를 쓰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가 봐야 고작 40명이나 50명쯤 되는 신자들을 만날 뿐입니다.”(1851년,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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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배티성지 전경. 사진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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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교우촌 순방에 나서는 듯한 최양업 신부 동상이 들어선 배티성지. 갓과 지팡이, 짚신에 괴나리봇짐이 먼 길 나서는 양반 차림새다. 사진 이승환 기자

성지 입구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을 곁에 두고 언덕을 오른다. 갓과 지팡이, 짚신에 괴나리봇짐. 먼 길 나서는 양반 차림새의 최양업 신부 동상이 순례자를 맞이한다. 차림 그대로 그는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하느님을 만난’ 목자였다. 무려 12년 동안 전국 방방곡곡 교우촌을 찾았다. 관할 교우촌만 127곳, 해마다 7000리(2800km)를 걸었다.

밀고자의 눈을 피해 한겨울 신자 집에서 쫓겨나 맨발로 산야를 헤매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소 따른, 피는 흘리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순교의 삶이었다. 가경자를 ‘땀의 순교자’, ‘길의 순교자’라 부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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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가 유학했던 마카오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 건물과 인근 성 안토니오 성당 외관을 재현한 최양업신부박물관 전경. 사진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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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각종 관련 사료들을 살펴볼 수 있는 최양업신부박물관 내부. 사진 이승환 기자

언덕을 다시 내려와 ‘순교현양’ 글귀 새겨진 커다란 비석을 끼고 양업교를 건너면 ‘최양업신부박물관’이다. 외관은 신학생 최양업이 동료 김대건(안드레아), 최방제(프란치스코)와 함께 유학했던 마카오 파리 외방 전교회 극동 대표부 건물과 인근 성 안토니오 성당을 재현해 놓았다. 전시실을 따라 한국교회 박해사, 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사목활동, 저서와 유물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박물관 곳곳에 놓인 둥글둥글한 모양의 백색 의자는 최양업 신부의 땀을 상징한다. 박물관을 나서는 길. 봇짐 짊어지고 양 떼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나서는 최양업 신부의 전신 초상화에 눈길이 멈췄다. 사목 여정 후 교우촌 앞에 이르러 늘 십자성호를 긋고 큰절을 올리던 모습을 떠올리며 복음화를 위해 온 몸을 던진 목자의 깊은 신심과 희생을 마음에 새긴다.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게 시복 시성의 은혜를 허락하시어 그에게 주셨던 굳건한 믿음과 온전한 헌신의 정신을 본받아 오늘 저희도 한마음으로 복음을 살고 전하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

“우리의 모든 희망은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고,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죽고 함께 묻히는 것이 소망입니다.”(1846년, 최양업 신부의 세 번째 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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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의 초상을 제대 곁에 모신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 성당 내부(왼쪽).  성당 외벽 기도문은 최양업 신부가 부제였던 1847년 홍콩에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전 라틴어 번역을 끝마치며 바친 기도다(가운데).  성당 입구에는 돌배나무 꽃 만발한 봄날의 배티성지를 배경으로 성부, 성자, 성령 아래에 최양업 신부와 9위 순교자가 배티 교우촌에서 만나는 것을 형상화한 대형 유리화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 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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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순교자 14인묘. 사진 이승환 기자

◆ 순례 길잡이

배티성지(www.baeti.org,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에서 313번 지방도를 따라 경기도 안성 쪽으로 향하다 보면 도로 우측으로 최양업 신부 옛 성당이 복원돼 있고, 고개를 더 오르면 복자 오반지 묘, 무명 순교자 6인묘·14인묘를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탄생 기념 성당에서 출발해 산상 제대, 복자 오반지 묘와 무명순교자묘, 옛 성당 등을 걷는 총 3.8km 코스의 ‘최양업 신부님과 함께 걷는 순례길’을 비롯해 4개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한국교회는 올해부터 최양업 신부의 선종일인 6월 15일을 가경자의 시복 시성을 기원하는 ‘전구 기도의 날’로 지낸다. 특별히 위중한 질병을 앓고 있는 본인, 가족, 친구, 지인 등의 기적적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도록 최양업 신부께 전구를 청하면 된다. 여건이 허락된다면 배티성지 등 가경자 관련 성지에서 구체적인 사람의 치유를 지향으로 주모경, 묵주기도 등과 함께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시복 시성 기도문’을 바치는 것이 좋다.

※ 성지 미사 : (월요일 제외) 매일 오전 11시
※ 순례 문의 : 043-533-5710

이승환 기자 ls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