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아들의 두 번째 월급날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고기를 얻어먹었다.
그 얼마 번다고 고기까지 사내라 하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사람이 돈을 벌면 고마운 사람에게 고기를 사야 한다. 왜? 인간의 사랑이란, 아가페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입에다 뭘 넣어주는 거다. 자식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퍼부어줄 나이는 19세까지다. 그 이후엔 조건부로 바뀌어야 한다. 부모라고 해서 퍼주기만 하다가는 나중에 후회한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엄마는 나에게 엄청난 사랑(돈)을 주셨던 분이다. 그 결과, 어른값도 못 하는 팔푼이가 되었다. 그러다 언니들의 피 토하는 투서로 친정에서 돈이 끊기고 바닥에서 몇 년을 벅벅 기어다니다 조금씩 정신을 차려 독립적인 인간이 되었다. 스스로 먹고 살기 위해, 아이들이 어렸을 때 오리고기 가공공장에 다닌 적이 있다. 냉동고처럼 추운 작업실에서 오리의 껍질을 벗기고 살을 발라내는 일이었다. 너무 힘이 들어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금요일마다 손에 들려주는 훈제오리와 백숙용 닭이 날 달래주었다. 애들에게 이걸 맛있게 먹일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어젯밤, 고기를 구워 내 앞에 놔주는 아들을 보며 참 좋았다. “저는 돈을 많이 벌 거예요”라고 말하는 아들에게 맥주 한잔을 시원하게 들이키며 말해 주었다. “돈을 많이 벌면 물론 좋지. 하지만 그게 맘처럼 쉽진 않아. 중요한 건, 네 힘으로 열심히 살아내겠다는 다짐. 그거면 된 거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은 고기 1인분을 더 주문했다.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를 낳아 키웠다. 목수인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가정을 지키고 보살피는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집을 떠나 자신의 삶을 살게 된 아들을 격려와 응원의 마음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부모의 역할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한자로 자식(子息)을 이렇게 쓰는데 ‘息’ 자는 ‘스스로 숨을 쉬고 생존한다’는 뜻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식이라는 한자를 ‘自食’이라 말하고 싶다. ‘스스로 일 해 돈을 벌고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요즘 세상이 젊은 친구들에게 스스로 밥을 벌어먹기에 힘든 건 맞다. 최저시급이 만 원도 안 되고 직장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초봉이 200만 원도 안 되는 곳이 태반이다. 야간수당을 챙겨주는 곳도 거의 없다. 부당함에 대해 말하면 잘리기 십상이다. 일할 사람은 많고 일할 곳은 없다. 월급을 받아도 월세를 내고 나면 통장에 남는 돈도 얼마 없다. 큰돈을 벌기 위해 뛰어든 곳은 빚만 떠안기 일수다. 저 혼자 살아남기도 힘든 세상이지만 그래도 나는 아들에게 고기를 얻어먹는다. 자신을 먹여주고 키워준 부모 입에 고기를 넣어주며 뿌듯해할 그 마음을 아이가 느껴보길 바란다. 그 뿌듯함으로 힘든 세상을 견디고 다음 월급을 받을 때까지 다시 힘을 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산다. 일하는 게 힘들고 고달파도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고기를 넣어주기 위해 버틴다. 그 힘으로 직장이 유지되고 나라가 돌아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마음과 고기를 입에 넣어주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自食’ 스스로 일해 밥을 먹고 살겠다는 마음. 그것을 믿고 지지하고 부모가 있다면 아이들은 결코 연약하지 않다.
글 _ 김양미 비비안나(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