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서 추방 당한 비운의 삶…떠돌며 쓴 「신곡」은 새 시대를 열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 사람들 이야기는 사실 당시의 피렌체 사람들 이야기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첫 번째는 단연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입니다. 물론 시인 단테가 르네상스 시대의 성당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당 이야기라면 피렌체 대성당에 돔 지붕을 얹은 피렌체 사람 필립보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1377-1446)부터 시작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보다 100년이나 앞선 단테를 이야기하는 것은 단테가 피렌체에 퍼트려놓은 뭔가 모를 새로움에 대한 희망의 물결이 브루넬레스키가 태어나기 전부터 아르노강을 따라 출렁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단테가 미친 영향은 그의 「신곡」(La Divina Commedia) 안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당시의 서적들은 귀족이나 지식인들의 전유물과도 같은 라틴어로 써져서, 일반 대중은 읽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신곡」은 모두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토스카나의 피렌체 방언으로 씌었습니다. 그래서 피렌체 사람 대부분이 쉽게 읽을 수 있었고, 글을 몰라도 누군가 읽어주면 금방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 면에서도 「신곡」은 당시 피렌체 사람들이 가졌던 중세의 그리스도교적 심성과 잘 맞아떨어졌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가톨릭교회의 사말(四末, 죽음, 심판, 천국, 지옥) 교리는 그들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피렌체 사람들이 「신곡」을 읽으면서 손을 놓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내세(來世)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이 살던 그곳 그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단테가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여행하면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그들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동시에 단테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함께 이야기를 풀어감으로써 피렌체 사람들이 고전에도 관심을 갖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고 현세의 삶이 모두 「신곡」 안에서 어우러져 피렌체의 평범한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품을 수 있도록 안내하였습니다.
단테가 「신곡」에서 이야기하는 피렌체의 이야기 중에서 오늘날까지도 흔적이 남아 있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피렌체의 아르노강에는 우피치 미술관과 피치 궁전을 연결하는 ‘폰테 베키오’(Ponte Vecchio)라는 그야말로 오래된 다리가 있습니다. 지금은 보석상들이 즐비한 이 다리에 「신곡」 천국편의 한 글귀가 새겨져 있는 표석이 있습니다.
“그렇건만 피렌체가 그 마지막인 성대(聖代, 평화의 시대)에 희생을 드려야 한 것은 다리를 지키고 있는 저 이지러진 돌이어야 했었구나.”(「신곡」 천국편 145-147, 최민순 신부 번역)
1215년 여름 피렌체 근교의 콘타도(contado, 귀족의 별장)에서 피렌체 귀족들의 파티가 열렸습니다. 그러던 중 부온델몬티 가문의 청년과 우르베티 가문의 청년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는데, 다행히 사태가 수습되고 그 표지로 부온델몬티 가문의 청년과 우르베티 가문 소속의 아미데이 가문 처녀를 혼인시키기로 합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결혼 하루 전날 부온델몬테는 도나티 가문의 아름다운 여인에 매혹되어 그녀와 혼인하기로 약속하고, 다음날 아미데이 가문이 기다리는 성당이 아닌 도나티 가문으로 가서 그녀와 약혼 서약을 하였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던 아미데이 가문은 이 소식을 듣고 극도의 모멸감에 복수를 결심하고, 어느날 폰테 베키오를 건너고 있는 부온델몬테를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부온델몬테가 도나티 가문의 꾐에 넘어간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아미데이 가문의 살인 때문에 피렌체의 평화가 사라졌다고 노래합니다. 이후 피렌체는 황제당과 교황당으로 분열되어 끝 모를 복수의 소용돌이에 휘말립니다.
1300년 단테는 정치에 입문하여 교황당 백파의 일원으로 시뇨리아의 의원이 됩니다. 그런데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이 흑파를 지지하여 백파는 실각하고 단테는 1308년 종신 유배형을 선고받습니다. 그해 단테는 「신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지옥편 제19곡 제8환 제3낭에서 그는 성직을 매매한 죄인들이 구덩이에 거꾸로 틀어박히고 발은 불에 태워지는 벌을 받는 것을 봅니다. 단테는 거기서 니콜라오 3세 교황을 보고 성직자의 부패를 탄식하며, 니콜라오 3세가 가상 현실로 보니파시오 8세를 보는 장면을 이렇게 전합니다.
저(니콜라오)는 소리치되, “진작부터 너 여기 있었느냐, 보니파시오야, 진작부터 너 여기 섰었느냐, 기록(미래를 예언한 기록)이 나를 속여 몇 해나 틀렸도다.”
단테는 베르길리우스의 안내로 지옥과 연옥을, 베아트리체의 안내로 천국을 여행하며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정화되고 구원되는지를 그리스도교적 시각에서 성찰합니다. 단테는 천국의 안내자 베아트리체를, 어렸을 때 그녀의 집에서 그리고 성인이 될 즈음 우연히 거리에서, 단 두 번 만납니다. 하지만 단테가 「신곡」의 전작인 「새로운 삶」(La Vita Nuova)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짧은 만남으로도 그의 사랑을 확정할 수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단테에게 이 혼돈의 세상에서 영원한 고요함과 아름다움 자체였습니다.
피렌체에서 추방되고 여러 도시를 전전한 단테는 1318년 라벤나에 도착하여 구이도 노벨로 다 폴렌타의 궁정에서 머뭅니다. 이곳에서 단테는 「신곡」의 천국편 집필에 집중하였고, 1320년 드디어 지옥과 연옥을 지나 천국에 이르는 12년 동안의 대장정 「신곡」을 완성합니다. 다음 해 단테는 라벤나의 외교 사절이 되어 주변국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베네치아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습지를 지나다 말라리아에 걸려, 1321년 라벤나에서 그가 그리던 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중세의 신학과 철학, 문학과 과학을 관통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을 수용하고, 당대의 혼란한 정치의 풍자에까지 이르는, 단테의 정신이 고스란히 베인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훗날 피렌체 사람들은 산타 크로체 성당에 그를 기억하는 무덤과 조각상을 남겨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습니다.
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
서울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후 1998년 사제품을 받았다. 2001~2008년 로마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교의신학을 공부했고, 2017년 로마 사피엔자 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고대·중세 건축사 연수를 했다. 현재 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위원, 의정부교구 통합사목국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