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요한묵시록의 구조

우세민
입력일 2025-01-05 16:59:08 수정일 2025-01-06 13:00:35 발행일 2025-01-12 제 3425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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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 편지’와 ‘환시’라는 크게 다른 두 갈래로 구성
천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구원에 대해 찬찬히 설명
우리 삶에 ‘예수님’이라는 분 끊임없이 갈망하도록 이끌어

요한묵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요한묵시록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요구한다. 대부분 주석서들의 첫 장은 요한묵시록이 이러 저러한 이야기들을 이러 저러한 순서로 적어나간 글이라고 소개하는 이른바 서술의 ‘외형적 구조’에 관한 것을 다룬다. 요한묵시록을 읽기 위한 하나의 제안일 수 있고, 요한묵시록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요약’이기도 해서 주석학자들마다 저마다의 관점에 따라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다양하게 소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혹은 보편적으로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바라보는 관점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먼저, 요한묵시록은 역사서나 복음서에 나타나는 연대기적 흐름을 염두에 두고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 구약의 역사서처럼 어떤 임금이 즉위해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고 어떻게 하느님 곁으로 갔는지, 아니면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 예수께서 어디서 언제 태어나셨고 갈릴래아를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 당신이 어떤 일과 말씀을 남기셨는지, 그 결과 언제 어떤 모습으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셨는지,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 있는 게 요한묵시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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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어 성경의 「요한묵시록」 첫 장. 박병규 신부 제공

요한묵시록은 두 개의 크게 다른 문학적 장르를 선보인다. 2장에서 3장까지의 일곱 개 편지와 4장에서 21장까지의 묵시문학적 환시들은 달라도 너무 다른 문학적 외형을 갖추고 있다. 학자들은 요한묵시록의 편집이 일곱 개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고 본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전례와 모임 안에서 일곱 개의 편지들을 읽어나갔고, 이후 일곱 개의 편지들이 소개하는 내용들을 묵시문학적 상징들로 새롭게 해석하고 소개한 4장에서 21장까지가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2장에서 3장까지는 일곱 교회가 처한 현세적 상황을 이야기한다고 여겼고 4장에서 21장까지는 그 현세적 상황에 대한 영성적 해석이라고 이해했다. 

요한묵시록의 본격적인 본문이라 할 수 있는 4장에서 21장 8절까지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어린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일곱 개의 봉인과 일곱 개의 나팔 이야기(4,1-11,19)가 첫 번째 부분이고,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키고 나서 펼쳐지는 악의 세력들의 서술이 두 번째 부분이다. 두 번째 부분은 왕관을 쓴 여인, 용, 두 짐승, 그리고 대탕녀 바빌론과 용의 멸망을 다루는 여러 장면들로 구성된다.

처음 일곱 개 편지는 문학적 장르가 바오로 서간이나 가톨릭 서간과 닮아 있고 대개의 내용이 훈계나 교훈에 관련된 것이라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의 이야기와는 차이가 있다. 4장에서 21장까지 역시 그렇다. 어린양을 주인공으로 하는 첫 번째 부분이 대탕녀 바빌론을 향하는 두 번째 부분과 대립하는 구도로 펼쳐지는데, 이것 역시 이야기의 설화적 혹은 연대기적 흐름이 아니라 대립하는 두 주체, 곧 어린양과 대탕녀 바빌론에 대한 묵시문학적 설명 혹은 해석으로 읽혀진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읽어내는 데 있어 또 다른 전통적 관점은 숫자 ‘7’과 관련이 있다. 일곱 개의 편지(2,1-3,22), 일곱 개의 봉인(6,1-8,1), 일곱 개의 나팔(8,6-11,19), 그리고 일곱 개의 대접(16,1-21) 순으로 요한묵시록은 짜여져 있다는 것. 각각의 ‘7의 시리즈’는 그 시작과 마침이 모두 천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천상은 이른바 ‘구원’의 완성을 가리키는 공간이어서 요한묵시록은 구원이 없는 상태에서 구원을 이루는 설화적 흐름이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을 향한 구원의 성격에 대해 찬찬히 설명하고 풀어놓고 있는 글이라는 것이다. 

다만, 구원을 이해하는 데 각각의 ‘7의 시리즈’는 처음과 끝 사이에 세상의 비참함이나 한계성, 그리고 악의 상황을 천상의 공간과 대비시켜 서술하고 있다. 하나의 ‘7의 시리즈’가 끝나면 또 하나의 ‘7의 시리즈’가 이어지는 구도로 짜여진 요한묵시록은 네 번에 걸쳐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구원은 그만큼 간절한 것이고 요한묵시록이 끊임없이 붙들고 있는 서술의 본질이다.

요한묵시록의 구조를 살피다 보면, 요한묵시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시작해서 ‘주 예수여, 오소서’라고 마치는 이유가 더욱 선명해진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는 것이고, 그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게 사실이다. 주어진 삶이 힘들기도 하거니와, 신앙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살면서 마주치는 유혹과 일탈이 우리가 붙들어야 할 구원에의 지향성을 더욱 어지럽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대탕녀 바빌론의 악함에 맞서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향한 걸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천상의 삶이 이 혹독한 지상의 삶을 통해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 요한묵시록은 찬찬히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분명한 건,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셨고, 이미 구원을 주셨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예수님을 여전히 갈망해야 한다는 것.

다만, 예수께서 오실 그날까지, 예수님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현실의 무엇이 이미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지속적으로 묻기 위해 요한묵시록은 여전히 읽혀져야 한다는 것. 요한묵시록의 구조는 그래서 우리 삶의 ‘오래된 미래’에 예수님이라는 변치 않는 분을 끊임없이 상상하게끔 우리에게 숙제를 남긴다. 계시는 여전히 우리의 상상 안에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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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대구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