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어디 좀 갔다 올 테니까, 형 오면 밥 잘 챙겨 주고 있어. 많이 늦지는 않아.”
고등학생인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5살 차이 동생은 엄마가 집을 나서며 남긴 말씀을 늘 내게 전했었다. 자식들에게 구체적으로 말을 못하시고 가끔 어머니가 볼일 보신다는 그 ‘어디’는 어디일까? 그 어디를 다녀오신 어머니의 얼굴은 어느 날은 밝아 보였고, 어느 날은 신경질적이고 어두워 보였다.
방 두 칸의 전세를 살면서 삼 남매를 키우고 있는 우리 집의 살림은 누가 봐도 넉넉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일주일이면 사나흘은 머리를 동여매고 있었고 늘 아프다고 하셨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는 41세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젊은 나이였지만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꾸려가야 하는 어머니가 지고 있던 삶의 무게가 무거웠을 거라고 짐작할 따름이다.
쪼들리는 살림에 그렇지 않아도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욕심 많은 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꽉 막힌 듯한 일상이 나아질 수 있는 묘수를 찾던 어머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점집이었다. 어머니는 점집에 다녀오신 후 종종 그 결과를 말씀해 주셨는데 어린 내 기억에도 받아온 점괘가 맞은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꽤 여러 번 다니셨다.
시간이 흘러 내가 결혼을 앞두고 있을 때도 어머니는 그 어디를 또 갔다 오셨다. 며느리에 대한 검증(?)이 궁금해서였다. 다행히 점괘가 나쁘게 나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큰 반대 없이 결혼을 했고 아내도 결혼하고 한동안은 시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그 어디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성당에 나가고 싶단다. 불규칙한 일정에 바쁘다는 핑계로 냉담 아닌 냉담을 하던 나에게 같이 가자는 제안을 했다. 뭔가 뒷머리를 세게 맞은 듯 ‘띵’했다. 그동안 신자인 내가 성당에 같이 다닌다는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아내는 교리 공부도 열심히 하고 구역 모임도 열심히 하고 성당 일에 진심이었다. 물론 그 이후로 그 ‘어디’는 일체 발길을 끊었다. 어머니에게도 그 ‘어디’는 사라졌다.
지금은 어머니도 식사 전에 성호를 긋는다. 신기하게도 성호를 긋는 어머니 모습이 대견하다. 예의에 어긋난 표현이지만, 아마도 어머니보다 한참 전에 세례를 받은 나로서는 그렇게 보이는가 보다. 성당에 같이 나가자고 할 때 그렇게 화를 내시던 어머니도 2010년 세례를 받으셨다. 어떻게 세례받을 생각을 하셨냐고 여쭤보니 며느리가 성당 다니는 모습이 좋아 보였다고 하신다.
남동생도 제수씨도 조카들도 다 세례를 받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위령미사에 가족 모두 참석하는 모습을 볼 때면 참 뿌듯하고 편안하다.
아직 남은 작은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는데 잘 안되는 것이 있다. 혼자 지내시는 어머니 마리아 자매님께 성당 노인대학에 나가시기를 권유하고 있는데, 영 반응이 없다. 물론 마리아 자매님의 이유도 이해는 된다. 초등학교도 졸업을 못하신 어머니가 사람들이 많은 노인대학에서 한글을 더듬는 것이 창피해서 가기 싫으시단다. 노인대학도 며느리가 다니는 모습을 보고 다니시려나? 이제 환갑을 갓 넘은 며느리가 벌써 노인대학을 나가기는 그렇고.
‘아하!, 10년 정도 지나면 가능하기도 하려나?’
마리아 자매님의 90대 중반 성당 노인대학 입학을 기대해 본다.
글 _ 장용 스테파노(방송인·한국가위바위보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