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창간 100주년 특별기획 –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8) 민족 상잔의 비극, 6·25전쟁

박영호
입력일 2025-06-04 09:28:42 수정일 2025-06-04 09:28:42 발행일 2025-06-08 제 3445호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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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으로 치달은 대결과 증오…이념 앞에 멈춰 선 복음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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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폭격에 파괴된 시가지와 어린이 모습. 출처 공공누리

해방 후, 한국교회는 반공과 멸공을 지상 최대 과제로 삼고, 공산주의 세력을 ‘악마’로 규정하고, 이에 맞서는 전쟁이 시작됐다고 선언했습니다. 공산주의와의 싸움은 반그리스도교를 대항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주일 새벽 4시.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된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간신히 해방된 우리 민족은 열강에 의해 강제로 분단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서로를 향해 증오에 찬 총부리를 겨눠야 했습니다.

1953년 7월까지 3년 1개월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이 야만의 전쟁으로 우리 민족의 인적·물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온 나라가 황폐해졌고 수많은 소중한 생명이 희생됐습니다. 천주교회보는 전쟁 발발로 휴간했다가 1950년 11월호부터 다시 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회보는 1950년 11월 10일 자에서 ‘양을 위해 희생된 거룩한 목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전쟁 와중에 희생된 성직자들의 소식을 전하고 교구별로 희생자와 피해 상황을 보고했습니다.

“교황사절 이하 세 위 주교를 납치당하는 잊지 못할 비분과 함께 적에게 잡히어 피살당한 성직자가 4명, 납치되어 끌려가신 주교와 신부와 수녀가 23명이며 교우 중 교회 단체의 간부가 13명, 행방불명된 성직자가 10명이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남침으로 비롯된 전쟁…남·북한 교회 모두 심각한 타격
한국 교회, ‘반공주의’ 내세우며 ‘멸공 총궐기’ 주장
평화 조약 없이 휴전…민족 화해·일치 노력 아쉬움 남아

3년여의 전쟁으로 희생된 사람은 30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유독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으며, 정확한 수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대 1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됩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민간인 희생자 수보다도 많습니다. 극단적인 이념 갈등이 원인인 전쟁이었기에 서로 대치를 하다가 사상이 다르면 무작정 학살을 자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교회의 경우에도 남한과 북한 교회 모두가 심각한 타격을 받았는데, 특히 북한 지역 교회 활동은 거의 정지됐습니다. 북한 교회는 전쟁 이전인 1949년부터 이미 타격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평양교구 홍용호 주교가 체포됐고, 함경남도 덕원의 성 베네딕도회 수도원 원장 신 보니파시오 주교도 체포돼 감옥에서 사망했습니다.

북한 지역의 성직자들은 사실상 전쟁 발발 전에 거의 모두 체포되거나 전쟁 중 살해되고 행방불명됐습니다. 대부분의 성당과 교회 기관은 폐쇄됐는데,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1949년, 평양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원은 1950년 해산됐습니다.

남한 교회 또한 대구교구 일부 지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 지도자들의 납치와 죽음으로 큰 인적 손실을 보았습니다.

당시 한국인 성직자 수는 모두 144명이었는데, 전쟁 전후에 체포돼 피살되거나 행방을 알 수 없는 한국인 성직자가 40명에 달해 4명 중 1명꼴로 희생된 셈입니다. 또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 대부분도 체포되었으며, 끌려간 153명 중 전쟁 후 돌아온 사람은 96명뿐이었습니다. 28명이 수감 중 사망했고, 17명이 살해됐으며, 12명은 행방불명으로 집계됐습니다.

이처럼 전쟁은 한국교회에도 심대한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교회는 의료봉사와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각종 순교 신심 운동과 성모 신심 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해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외국교회의 구호물자를 피난민에게 나눠주며 굶주리는 이들을 구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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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1월 2일 원산성당에서 봉헌된 전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 미사 모습.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깊이 성찰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맹목적인 반공과 멸공주의 그리고 같은 동족과의 전쟁에서 무력과 폭력을 통한 말살을 유일한 목표로 삼는 것이 과연 복음적인 것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과 북이 서로에게 가한 야만적인 처사와 그로 인해 생겨난 증오와 적개심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하지만 교회마저 민족의 분열과 분단, 전쟁이 가져온 비극적인 참상 앞에서 증오와 대결을 유일한 길로 여긴 것은, 적어도 후대의 우리들이 생각할 때 복음의 정신과 배치되는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입니다.

전쟁 후 발간된 천주교회보는 예외 없이 공산주의라는 악마와의 대결에서 무력으로 승리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1950년 11월 10일 2면에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신자들에게 보내는 서한이 실렸습니다. 이 서한에서 노 주교는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있는 한 세계에 평화 수립은 불가능하다며 모든 신자에게 “멸공에 총궐기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노 주교는 당시 로마를 거쳐 파리에 머물다 전쟁 소식을 듣고 홍콩과 일본,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돌아왔습니다.

“형제상살의 비극의 원인은 오직 무신론 공산주의 침략자들의 마수였습니다. …저 악독한 공산주의자들도 이전에 천주를 믿고 그리스도 신앙을 가졌을 때는 가장 사랑할 민족이었으며... 한번 저 사상에 물들리자 저렇게 악독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진정한 회개를 위하여 기구와 보속하는 동시에 이 사상의 박멸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맹세합시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같은 신문 4면, 편집부가 작성한 ‘전란의 교훈’이라는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안일에 흐르며 부패해지는 근성이 있으며 재난을 당해서 반발해서 향상함으로 전쟁도 가열한 자연계의 시련과 같이 인류를 타면에서 각성시키고 이를 이끌어 진진한 건설과 진보에로 향하게 하는 데 효과가 큰 것이다.”(천주교회보, 1950년 11월 10일)

민족적 비극의 참상이 되고, 분단의 원죄를 자아낸 전쟁이 각성과 진보로 나아가는, 정당하고 필요한 것으로까지 합리화되는 구절입니다. 무신론자들에 대한 철저한 말살의 신념을 확고히 한 교회는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참담한 전쟁에 대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종교적 수난과 시련으로 포장하기도 했습니다.

한 핏줄 한 가족들이 생이별해 그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눈을 감을 수조차 없는 비극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휴전 협정이 체결됐지만 이는 잠시 전쟁을 멈춘 것일 뿐, 평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전쟁 상태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반공과 멸공보다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은 훨씬 더, 수십 년이나 지난 뒤에야 조금씩 우리 민족의 마음에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박영호 기자 young@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