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평화를 원한다. 남과 북이 갈라진 한반도에서는 더욱 절박하다. 그러나 최근 사드의 기습 배치를 둘러싼 격렬한 대립이 보여주듯, 평화의 길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입장은 무엇일까?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이사 32,17)입니다.” 2014년 한국 방문 첫날, 프란치스코 교종이 청와대 연설에서 하신 말씀이다. 평화는 “전쟁의 부재”나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가 아니라, “정의의 작품”이며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그 질서의 열매”다(「사목헌장」, 78항). 정의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질서, 곧 창조 질서에 있고, 평화는 창조 질서가 보전될 때 이루어진다.
창조 질서 보전에서 본 정의는 신앙과 관련 없는 어떤 올바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정의는 신앙 자체에서 비롯된다. 참된 신앙은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것을 요청한다. 하느님의 뜻이 하느님이 세상에 심어 놓으신 창조 질서에 있으며, 따라서 신앙은 창조 질서의 존중과 보전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신앙 자체가 정의를 요구한다. 신앙은 정의와 분리될 수 없다.
창조 질서 보전에서 본 정의는 인간 사회만이 아니라 자연에도 적용된다. 사회 정의를 말한다면, 자연의 정의, 곧 생태 정의도 말해야 한다. 사회 정의와 생태 정의는 별개가 아니라, 창조 질서 보전의 두 가지 측면이다. 생태 정의 훼손의 일차적 피해자는 사회적 약자이며, 사회 정의 훼손은 생태계 악화를 초래한다. 4대강 사업, 핵발전소, 밀양·청도의 송전탑이 좋은 사례들이다.
사회정의가 제대로 있었다면, 4대강 사업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편법과 변칙으로 시작된 4대강 사업으로 강은 망가졌고, 강가에서 농사짓던 농부들은 땅을 잃었다. 우리는 “지구의 부르짖음과 가난한 이들의 부르짖음”을 모두 귀여겨 들어야 한다(「찬미받으소서」, 49항).
“인간에 대한 온유, 연민, 배려의 마음”(「찬미받으소서」, 91항)이 없는 사회는 자연생태계도 존중하지 않는다. 송전탑으로 삶의 터전을 짓밟힌 밀양과 청도의 힘 없는 이들을 존중했다면, 불과 며칠간의 동계올림픽을 치른다며 가리왕산 원시림을 밀어버렸을까?
“자연을 단지 이윤과 이익의 대상으로만”(82항) 취급하는 사회는 사람도 존중하지 않는다. 우리가 설악산의 산양을 존중했다면, 과연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까?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을 능멸하고, 세월호를 3년씩이나 바다에 방치했을까?
이렇게 호세아 예언자의 말은 오늘 다시 현실이 된다. 이 땅에 “저주와 속임수와 살인, 도둑질과 간음이 난무”하고 “들짐승과 하늘의 새들, 바다의 물고기들 마저 죽어 간다.”(호세 4,2-3)
오늘 우리의 문제는 “환경 위기와 사회 위기라는 별도의 두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환경적인 하나의 복합적인 위기”다(「찬미받으소서」, 139항). 따라서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생태적 접근은 가장 취약한 이들의 기본권을 배려하는 사회적 관점을 포함”(93항)하고, 사회적 접근 또한 생태적 관점을 깊이 고려해야 한다.
우리 자신도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창조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깨닫고 “겸손한 존중”(89항)으로 타자를 대할 때에만 오늘의 문제를 풀 실마리가 보일 것이다. 하지만 막무가내로 사드 배치를 밀어 붙여 온 현 정부에서 성주 주민을 비롯한 이 땅의 사람들에 대한 겸손한 존중의 태도를 과연 찾아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