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정의와 동떨어져 있다면 위선에 머무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 담긴 공정과 자비 실행 심판과 자애, 이중적 의미도 가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토대로 복음 수용하려는 의지 성찰해야
빌라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 하느님께로부터만 흘러나오는 참된 가치들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던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했던 걸까요? 아니면 칼과 무력이 힘이고 진리인 세상에서 힘없는 피신문자가 진리 운운함을 조롱한 걸까요? 당시는 강대국이 약소국을 무자비하게 압제하는 시대였고 식민지 총독이었던 그에게 무력은 진리이자 통치 정의를 위한 확실한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세상은 그것이 진리라 여겼습니다. 자연스레 강자와 약자 모두 자신의 권리와 이익만을 지키려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의는 이익 다툼 속에서 항상 상대적인 것으로 폄하되고 왜곡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불의한 일은 나만 안 당하면 된다는 안이함이 있고, 내 이익을 위해 진실을 숨기는 욕심이 또한 있으며, 진리와 정의를 알고도 침묵하는 위선이 숨어 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 가르침은 정의를 선명하고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왜냐하면 4추덕의 하나인 정의는 절제, 용기, 지혜와 함께 하느님에게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정의도 신앙과 하느님을 통해 조명할 때 그 진의를 깨닫습니다. 먼저 계시의 원천인 성경을 봅시다. ■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정의 성경 속 정의는 하느님 말씀과 계명에 근거하며, 이를 정확히 준수하는 것입니다. 정의는 하느님 말씀 속에 담긴 공정과 자비를 실행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의롭고 거룩하며 완전한 사람이 됩니다. 또한 성경 속 정의는 사회적 약자들, 과부나 고아·노예·이방인에게 환대와 사랑을 베풀 것을 강조했고, 예언자들은 약자가 고통 받는 구체적인 현실 상황을 직시하며 힘없고 가난한 자에 대한 폭력과 착취를 통렬하게 규탄했습니다. 그리고 탐욕과 문란함은 종교적·윤리적 악(惡)이자 불의함이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정의는 심판과 자애라는 이중적 의미도 갖습니다. 아무리 하느님 백성이라도 잘못을 하면 벌을 받을 수 있으나(신명 33,21; 아모 5,24) 동시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이에게 하느님께서는 한없는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시편 116,5-6) 정의는 인간과 사회를 의롭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인간 입장에서는 어떤 보상만을 얻기보다 하느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신뢰하기에, 그분과의 일치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한국가톨릭대사전」 ‘정의’ 참조)이주형 신부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