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인류의 이름 ‘아담’은 땅이나 흙을 뜻하는 히브리어 ‘아다마’에서 나왔다. 하느님이 흙을 빚어 만들었으니 흙에서 나왔다는 뜻이기도 하고, 평생 땅을 일구어 살아야 하는 운명을 지닌 ‘땅의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인류 창조는 땅을 일구고 흙을 빚은 노동으로 시작되었고, 인간에게 땅을 일구어야 하는 노동의 사명을 맡김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인간은 땅을 일구며 노동을 통하여 자연을 돌보고 만물과 더불어 살아간다. 그러니 사람은 땅과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노동하는 인간이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더욱더 인간다워지고 또한 더욱더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간다. 노동은 인간에게 씌워진 죄의 굴레가 아니라, 하느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멋진 일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
살짝 경제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고전 경제학에서는 생산의 세 가지 요소로 자본과 토지, 그리고 노동을 꼽는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쳐져 생산이 이루어지고, 이 세 가지 요소로 수입에 대한 배분을 설명한다. 즉 수입의 종류를 따져서 말하자면, 자본이 만들어내는 수입을 이윤,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지대, 그리고 노동에서 나오는 수입을 임금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조금만 더 주의 깊게 생각해보면, 생산의 세 요소들 가운데 노동이 가장 먼저 있었고,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땅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즉,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을 짓기 위해서 땅을 고르고 변형시킨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느님이 주신 것에 인간 노동이 더해졌을 뿐이다. 자본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장이 세워지고 그 공장에서 새로운 생산물이 나오더라도, 그 공장은 하느님이 주신 것에 인간 노동이 더해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담 스미스는 자본을 ‘육화된 노동’이라고 했고, 리카아도는 ‘축적된 노동’, 그리고 마르크스는 ‘지나간, 대상화된, 죽은 노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성 요한 바오로2세 교황께서 지적하듯이, “우리는 우선 교회가 항상 가르쳤던 원칙, 즉 노동이 자본보다 우위에 있다는 원칙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 원칙은 생산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생산과정에서 노동은 항상 주요 동인(動因)이 되지만, 생산 수단의 집적인 자본은 다만 하나의 도구 또는 도구인(道具因)이 될 뿐이다. 이 원칙은 인간의 역사적 체험의 총체에서 얻은 명백한 진리”(노동하는 인간, 12항)인 것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자본 없는 노동을 상상할 수는 없지만, 가톨릭교회의 사회교리는 노동이 자본보다 우선적이고 우위에 있음을 분명히 천명한다. 그런 뜻에서 자본은 인간의 노동에 봉사해야 하고, 경제는 인간에게 봉사해야 한다.
그러니 한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건전한지를 볼 수 있는 것은 그 사회가 얼마나 인간의 노동을 존중하고 노동자에게 정당한 대우를 주는지에 달려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서는 노동이 존중받기 보다는 토지에 대한 이익과 주식 등 자본에 대한 이윤이 더 손쉽고도 많은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고, 심지어는 자본 이윤을 위해 인간 노동이 희생되기까지 한다. 투기나 주식투자보다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사회, 이것이 이 땅에서는 정말 꿈같은 일일까?
여전히 이 땅에서는 노동하는 ‘아담’들은 땅(‘아다마’)을 딛지 못하고 굴뚝 위에서 또는 철탑 위에서 겨울을 이겨내야만 한다. 또 어떤 ‘아담’들은 무릎과 팔과 머리를 땅에서 떼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아담들의 이름은 해고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이러한 아담들이 자신들의 ‘아다마’(일터)로 돌아갈 날을 기다린다.
이동화 신부는 1998년 사제품을 받았으며, 2010년 교황청 그레고리오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노동사목을 담당하며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 사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