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교구 사제 피정을 다녀온 선배신부님을 만났습니다. 본당 근처에 있는 동네 공원을 함께 산책하면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여름의 끝자락이라서 그런지 날씨도 좋고 바람도 상쾌하게 불어 마음마저 가을로 물드는 느낌이었습니다. “형, 이번 피정 가서 좋은 묵상 많이 했어?”
“뭐, 늘 그렇지. 그런데 이번에도 저녁마다 젊은 신부님부터 선배 신부님까지 내 방에 찾아와서는 이러저러한 고민을 털어놓고 갔어. 나는 상담을 배운 적도 없고, 사목 경험도 그렇게 많지 않은데 다들 나에게 와서 자신들의 힘든 이야기를 하고 가더라. 피정 동안 동료 사제들 고민과 고충을 듣다가 피정이 다 끝나 버린 것 같아. 그래도 뭐, 나름 의미 있고 좋은 피정이었어!”
“이야, 우리 형, 요즘 교구 동료 신부들 사이에서 인기가 계속 상한가로 치솟네. 그 인기의 비결이 뭐야?”
“야, 인기는 무슨. 그냥 내가 좀 만만해 보이니까 그러는 거지. 만만하니까 신부들이 와서 사소한 이야기에서부터 심각한 이야기까지 하고 가는 거야. 우리 삶, 뭐 있어! 그냥 같은 신부로 살아가면서, 특히 사제 연차가 높으면 높을수록 동료 사제건 본당 신자건 나를 좀 더 만만하게 생각하게 하는 것, 그렇게 사는 게 우리 삶 아니겠어?”
“만만하게라. 형, 그거 진짜 어려운 건데. 모두가 자신을 만만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건 힘들지, 힘들어.”
“그래, 힘들지. 하지만 신부로 사는 동안 버려야 할 몇 가지 생각들을 잘 버리려 노력하면 되는 것 같아. 내가 사제니까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그런 생각을 버리고, 내가 사제니까 사람들이 내 말을 다 따라야 한다는 그런 판단을 버리고, 내가 사제니까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런 끔찍한 마음을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본인 스스로 생각을 더 깊이 있게 할 수 있고, 외적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편안하게 대할 수 있고. 그러다 보면 만만하게 되는 거지, 뭐. 그렇게 사는 것이 만만한 거 아니겠어.”
“에이, 형. 그래도 형이 그리 만만한 사람은 아니잖아.”
“그럼, 나도 사람이고 성질이 있는데. 앞으로 만만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는거지. 하지만 사제라며 다 안다고 우기는 사람, 사제라며 신자들을 윽박지르는 사람,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하고는 절대 타협하지 않지.”
사실 그 형도 신학생 때나 사제 초년생이었을 때 한 성질 했답니다. 한여름 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여름이 자연스럽게 세상의 이치에 따라 가을로 물들 듯 그 형 역시 자연스럽게 세상의 이치에 자신의 삶을 가을로 물들여 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편안한 사제이고, 누구나 자연스레 기댈 수 있는 사제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그 형은 만만한 사제가 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오늘 그 형을 만나러 가야겠습니다. 얼마나 또 만만하게 변했는지 은근히 약 올리며 놀려대고 싶은 날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이 가을바람,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