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고민이 생겼다. 외출했다 돌아오면서 위층인 우리 집에 불이 켜져 있으면 왠지 안심이 된다는 아래층 안나 할머니에게 어떻게 이사 간다는 말을 꺼낼 것이며, 이별을 통보해야 할지 마음이 여간 무겁지 않다.
혼자 사시는 안나 할머니는 종종 이런저런 도움을 청한다. 며칠 전이다. 아주 이른 아침에 무엇이 그리 급한지 초인종을 연거푸 누르시기에 놀라 문을 열었더니 “핸드폰을 잃어버렸는데 어쩌면 좋으냐?”며 혼이 빠져 말씀도 제대로 못한다. 어젯밤 늦게 예방접종 문제로 나와 통화를 했으니 그럴 리가 없을 거라고 안심시키며, 할머니 집으로 내려가 전화를 걸며 귀를 세웠다. 그때 밤새 장롱 속에 갇혀 숨이 막힌 핸드폰이 ‘엥엥~’ 모기소리만 한 신음(벨)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닌가.
코로나19로 인해 적지 않은 시간 온 세계가, 온 국민이 다 함께 고통을 겪고 있지만 특히 어르신들의 고충은 더 크다.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지침에 따라 유일하게 동료들과 친교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노인정도 공원도 폐쇄되고 자식, 손주들조차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는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외로움을 넘어 고립감에 불안해하는 어른들이 적지 않다. 모든 문화적 활동, 공동체 활동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져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그러니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야 하고 익숙해져야 하는데 가족공동체, 사회공동체에 익숙한 기존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삼으면 반전이 있다. 미사조차 중단되는 극한 상황을 통해 그간 내 신앙생활의 행태를 되돌아보며 혼자 있으므로 주님과 좀 더 친밀해지는 기도와 묵상의 시간을 많이 갖게 된다.
지난 여름이다. 여느 주일 같았으면 미사를 드리고 있을 시간. 하지만 성당으로 달려갔어야 할 그 시각 성당으로 가지 못하고, 터벅터벅 산을 오르다 북적대는 등산객들의 틈을 저만치 벗어나 바위에 외따로이 앉았다. 코로나19 방역지침에 따라 미사가 중단된 지 벌써 수 주일이 지났다. 하지만 미사와 종교 활동이 곧 재개될 수 있겠다는 희망보다 매일 환자 수가 심각하게 늘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뿐이었다. 마음이 바위처럼 무거웠다. 주일인데도 불구하고 텅 빈 성당에 혼자 외로이 계실 십자가의 예수님을 생각하니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무딘 인간의 마음은 상황이 이렇게 되고서야, 자유롭게 미사를 드릴 수 있고 영성체를 할 수 있었던 그때가 얼마나 큰 은총의 시간이었는지 깨닫는다. 아무 일 없이 일상이 편할 때는 미사참례를 해도 그 소중함을 잘 몰랐다. 그야말로 타성에 젖어서 진정한 제사(미사)가 아닌, 그저 전례 참석에 불과한 형식적인 행위에 그치지 않았던가 하는 후회로 가슴이 옥죄었다. 저 아래 성당 십자가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묵주기도를 바치는데 예수님께서 저만치(겟세마니동산) 홀로 외따로이 기도하고 계셨다. 인간의 이기적 난무로 인하여 바이러스로 뒤덮인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고통에 짓눌리실 성심을 생각하니 멀찌감치 있던, 무심했던 내 마음이 예수님 가까이 한 걸음 한 걸음 뜨겁게 다가갔다. 그간 경험하지 못한 뜨거움으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로 인해 고립감을 느끼고 심한 경우 불안이 커진다고 한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혼자여서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 동행의 시간을 많이 갖고 나보다 더 힘들어 하는 이웃과 소통하며 공유할 수 있는, 삶의 지혜도 구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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