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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봅시다] (25·끝) 인류의 영원한 멘토 단테「신곡」

입력일 2021-12-22 수정일 2021-12-22 발행일 2021-12-25 제 3275호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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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적 인간상 회복에서 희망을 찾다
700년 전 시대의 절망을 느낀 단테
구원의 절대 덕목으로 ‘신망애’ 강조
지복직관으로 이끄는 희망의 예언자

지옥 편은 신앙 없는 군상의 비참함을
연옥에선 희망 안에 수행하는 죄인을
천국 편은 하느님 만나는 지복자 그려

이탈리아 베로나에 있는 우노 찬노니의 ‘단테상’(1865년).

2002년 일본의 철학자인 이마미치 토모노부 선생으로부터 뜻밖에 「단테 신곡 강의」를 선물로 받고 나의 「신곡」 공부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20년이란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나의 관심이 오로지 「신곡」에만 집중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철학자인 스승이 생의 거의 마지막 무렵까지 「신곡」을 붙들고 있었다는 점, 「신곡」이 시로 쓰인 점, 그것도 내가 접근할 수 있는 이탈리아어라는 점, 문학·철학·신학 등 인문학만이 아니라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의 지적 배경을 요구한다는 점, 그 영향력이 문학만이 아니라 미술, 음악, 연극, 영화, 애니메이션 등 전 예술 장르에 퍼져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하여간 「신곡」은 이른바 요즘 유행하는 지식 융합의 최상의 모델이라는 점에서도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고전(古典) 「신곡」을 끝까지 다 읽는다는 것은 고전(苦戰)의 연속이었다. 물론 한 번이라도 완독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재독(再讀), 삼독(三讀)을 하게 된다. 나도 작년이 안식년이었지만, 코로나 재난 덕분에(?) 아무 데도 가지 못하고 그저 「신곡」만을 다시 정독하였다. 무엇보다도 엄두가 나지 않던 2000페이지가 넘는 싱글턴의 주석을 함께 읽을 수 있던 것은 커다란 소득이었다.

예기치 못한, 아니 이미 예견된 전 지구적 종말론적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기후 온난화로 인한 가뭄, 홍수, 산불과 함께 코로나19라는 전대미문의 역병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인류라는 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일찍 침몰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이러한 절망감의 양상은 시대마다 다르겠지만, 700년 전 단테 역시 자신의 시대를 절망적으로 느꼈다. 하지만 올해 3월 25일 단테의 날을 맞아 프란치스코 교황이 교서에서 밝힌 대로, 단테는 ‘희망의 예언자’였다.

단테는 지옥 편에서 신앙이 없기에 절망할 수밖에 없는 군상의 비참함을 보여준다. 연옥 편에서는 참회의 눈물 한 방울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기에 정죄(淨罪)의 과정을 희망 안에서 수행하는 죄인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국 편에서는 그 믿음과 희망을 지니고 하느님의 사랑을 만나는 지복자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때나 지금이나 그리스도교의 신망애(信望愛)라고 하는 대신덕(對神德)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덕목이 된다. 단테는 「신곡」에서 이 신망애 향주삼덕을 자주 언급한다.

예를 들면, 연옥 편 제29곡에서는 성경의 묘사 전체가 신망애를 드러낸다. 구약성경을 상징하는 24명의 장로는 믿음을 뜻하는 하얀 백합꽃 화관을 쓰고 있으며, 네 복음서를 상징하는 네 마리의 짐승은 소망을 뜻하는 초록 잎사귀를 머리에 두르고 있고, 신약성경의 서간들을 상징하는 일곱 명의 노인들은 사랑을 뜻하는 장미와 빨간 꽃들을 두르고 있다. 또한 연옥 편 제30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의 모습 역시 ‘하얀 베일에 초록색 웃옷 아래 생생한 불꽃색의 옷을 입고 서 있다.’ 천국 편에서는 그리스도의 세 애제자 사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결정적으로 신망애를 대표하며 단테의 천국 입국 심사를 맡는다. 그만큼 단테에게는 이 신망애 삼덕을 갖추는 것이 세례를 대신할 만큼 구원의 절대 전제가 되고 있다. 오죽하면 자신의 세 아들의 이름조차도 야고보, 베드로, 요한으로 지었을까.

확실히 「신곡」의 사상적 중심은 천국 편에 있다. 그것은 이마미치 선생이 말한 대로 “전 인류의 세계 미화(美化)로의 전면적인 방향 전환”(천국27,145-148)이다. 지구 전체가 신음하고 있는 오늘날 이 방향 전환의 실현은 천국 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사추덕(四樞德)과 대신덕의 회복 즉 완전한 그리스도교적 인간상의 회복에 달려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신곡」은 언제나 우리에게 삶의 방향을 새로이 정립시키는 인류의 멘토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말은 말하기 전까지만 말하는 사람의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시도 시가 완성되기 전까지만 시인의 것이리라. 영화 ‘일 포스티노’에는 공산주의자 시인 파블로 네루다와 우체부 마리오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네루다가 “내 시를 도용하라고 한 적은 없네”라고 말하며 마리오를 꾸짖자, 마리오는 “시란 시를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응답한다. 네루다의 연인 이름은 마틸다이고, 마리오의 아내 이름은 베아트리체이다. 이 영화와 「신곡」 사이에 있는 깊은 연관이 감지된다. 그렇다면 「신곡」은 누구의 것일까? 시인 단테의 것일까? 아니, 「신곡」은 「신곡」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모두의 것이다.

작가 보르헤스(1899-1986)는 말한다. “「신곡」은 누구라도 읽어야 할 책이다. 그것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문학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이다.” 나 역시 독자들 모두 또 한 명의 주인공 단테가 되어 「신곡」순례의 끝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는 참 행복을 누리시길 간절히 빌어본다.

※그동안 ‘단테의 「신곡」 제대로 배워 봅시다’를 집필해 주신 김산춘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김산춘 신부(예수회·서강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