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수원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 (20) 손골성지 : 조선의 두 번째 사제

이승훈
입력일 2024-03-18 수정일 2024-03-21 발행일 2024-03-24 제 3385호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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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성지 성당 전경. 사진 이승훈 기자

광교산 기슭에 자리한 손골성지. 손골성지는 특별히 성 도리 헨리코 신부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를 현양하고 있다. 그러나 손골은 조선의 두 번째 사제,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 동료 사제들과 함께

손골에 관한 최양업 신부의 기록은 그가 1857년 9월 14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을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저는 두 번이나 페롱 신부님을 찾아가서 여러 날 묵었다”고 밝혔다. 이어 “저는 신부님이 미리 알려주신 덕분으로 페롱 신부님을 잘 알고 있었고, 페롱 신부님도 저의 외로운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우정을 느꼈다”며 “또 우리가 인연으로 함께 묶여있음을 미리 맛보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눴다”고 손골에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전국 방방곡곡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신자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 해에만 조선 신자의 28%를 만났다고 하니 그 고단함을 짐작하기조차 어렵다. 외롭고 고단한 여정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 중 하나가 바로 함께 사목하는 동료 사제들이었다.

홀로 외진 교우촌을 찾아야 했던 최양업 신부는 대부분 혼자 사목할 수밖에 없었지만, 동료 사제들과 함께 사목하는 일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활동이 신학생 양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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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성지 십자가. 사진 이승훈 기자

최양업 신부는 1854년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조선에서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떠난 신학생 3명의 안부를 물으면서, 신학생을 지도하는데 필요한 각 신학생들의 특성과 신앙, 지식수준, 염려되는 점 등을 설명했다. 최양업 신부가 안부를 물은 신학생들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최양업 신부 등에 이어 선발된 조선인 신학생들이었다.

최양업 신부 이후 신학생 양성이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850년 제3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가 후에 제5대 조선대목구장을 맡게 되는 성 다블뤼 안토니오 신부에게 신학생 교육을 명하면서부터다. 이후 다블뤼 신부는 신학생을 양성하기 시작해 1854년 3월 신학생 3명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다블뤼 신부는 이 기간 중 1853년 여름에는 손골에서 머물기도 했다.

자료의 부족으로 최양업 신부도 신학교 설립과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는지, 그 장소가 구체적으로 어디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최양업 신부와 동료 사제들의 서한에서 유추해 볼 때, 최양업 신부는 조선인 신학생 각자를 상세히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양업 신부가 직접 신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다면 알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 경신박해와 최양업 신부의 선종

최양업 신부가 열정적인 사목을 펼친 결과, 조선교회의 교세는 크게 성장하고 있었다. 1859년 11월 베르뇌 주교는 예비신자를 1200명 이상으로 추산했는데, 그 수는 2개월 만에 2000명으로 증가했다. 최양업 신부도 1860년에는 자신이 맡은 사목지에서만 세례 받을 준비가 된 예비신자가 1000명 가량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신박해는 이런 희망을 무너뜨렸다. 경신박해는 1859년 말 개인적으로 천주교에 반감을 품고 있던 좌포도대장과 우포도대장이 조정의 허가 없이 교우촌들을 급습하면서 시작됐다. 이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잡혔는데, 이 과정에서 신자들의 재산을 가로채고 집을 불태우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당시 조정은 비교적 천주교에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는데, 약탈과 방화 등의 만행이 저질러지자 두 포도대장을 파면시키고 박해를 중단시켰다.

경신박해는 국가가 주도한 대대적인 박해는 아니었지만, 최양업 신부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전국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최양업 신부는 주요한 박해 대상이었다. 박해자들에게 붙잡힐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이에 최양업 신부는 박해를 피해 경상도 남쪽의 죽림 교우촌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사목을 멈추지는 않았다. 밤에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낮으로 인근 교우촌을 찾고 성사를 집전하면서 활동했다. 그 누구보다 자신이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최양업 신부는 그보다도 신자들이 박해의 위협에 신앙을 잃는 것이 더 걱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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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골성지 성당과 성지 마당. 사진 이승훈 기자

박해가 잠잠해지자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성사 집전 상황을 보고 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서울로 가던 중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치면서 위중한 상태가 됐고, 결국 그해 6월 15일에 선종했다. 베르뇌 주교가 “우리 중에 가장 튼튼한 사람은 최 토마스 신부”라고 말했을 정도로 건강한 최양업 신부였지만, 경신박해로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크게 쇠약해졌던 것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푸르티에 신부는 “그(최양업)는 아주 열정적으로 예수, 마리아 두 이름을 되풀이하고 있었다”면서 “두 이름을 죽기 직전의 고통 속에서도 그처럼 분명하게 발음하는 것을 보며 각별한 은총이라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미 경신박해로 침체된 조선교회는 최양업 신부의 선종으로 또다시 큰 슬픔에 빠졌다. 최양업 신부의 빈자리는 그가 아닌 다른 누가 메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페롱 신부는 “그(최양업 신부)의 죽음은 조선교회 전체의 초상”이라고 슬퍼했다. 그는 특히 “그(최양업 신부)가 남쪽의 오지에서 방문하던 지역들은 지금까지 서양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곳이었고, 그의 한문 지식과 조선인으로서의 장점은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일에 누구보다 적격이었다”며 “종교 자유가 선포될 때까지는 이 곤경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