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저를 보내주십시오] 예수회 박문수 신부(하)

박주헌
입력일 2024-05-10 수정일 2024-05-14 발행일 2024-05-19 제 3393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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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수입이어도 마음은 한국산…이 땅의 빈민 곁을 지킬 겁니다”

생물학 교수를 꿈꾸던 예수회 박문수 신부(Francis Xavier Buchmeier·프란치스코·83)는 1974년 미국으로 돌아가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노동조합 운동을 펼치는 가톨릭신자들이 투옥·고문당하는 현실을 목격하고, 왜곡된 도시계획을 위한 재개발과 철거 강행 으로 고통받는 농민, 노동자, 도시빈민을 위한 해방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박 신부는 1985년 귀화하자마자 ‘천주교도시빈민회’(이하 천도빈)에 가입하고 철거민들의 현장에 참여하는 등 가난한 이들의 터전으로 뛰어들었다. 메말랐던 세상, 박 신부는 가난한 이들의 동반자로서 어떻게 기꺼이 헌신해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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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신부는 “순교 역사를 지닌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흐름을 그대로 따라 세속화되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정의를 외치는 사명을 굳건히 수행하길 바란다”고 말한다. 사진 박문수 신부 제공

■ 가난한 이들의 현장으로

1980년대 우리나라의 도시계획 목표는 가난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추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울 사당동, 목동, 상계동 등 재개발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집을 빼앗기고 쫓겨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들이닥친 철거반원들의 폭력으로 많은 주민이 다쳤다.

미국에서 사회학 박사학위 취득 후 귀국한 박 신부는 서강대학교 교수로서 도시빈민운동과 주민운동 단체의 활동에 도움이 되는 연구 및 분석을 계속했다. 가난한 이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여러 활동을 펼치던 천도빈의 일원이었지만 그가 주로 하는 일은 빈민 문제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하는 조력자 역할이었다. 그런 그가 현장에 동참하게 된 것은 1986년 상계동 강제 철거 사건 이후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이유로 상계동 등 200여 곳에서 철거가 강행됐다. 박 신부가 기억하는 철거는 매우 잔인했다. 대규모로 침입한 깡패들이 여성들의 머리채를 잡아 내던지고 상처를 입혔다. 경찰들은 개입하지 않았고, 오히려 폭력에 쓰러진 주민들을 연행했다.

“소식을 들은 그날 저녁 저는 달라졌습니다. 학자로서의 연구에는 한계가 있었어요. 현장과 괴리되지 않은 연구를 위해 주민들과 직접 함께할 필요성을 절감했죠.”

그렇게 박 신부는 “멀리서 객관적인 연구를 하는 것보다 참여하는 사람과 같은 입장에서 체험하면서 연구해야 한다는 것”에 눈떴다. 재개발 지역을 찾아 철거민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는 등 본격적 빈민 사목에 나섰다. 강제 철거 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 상계동 현장에 뛰어가 주민들과 함께했다. 쫓겨나는 주민들의 아픔을 학생들이 직접 목격하게 하는 현장 강의들도 펼쳤다. 학생들과 함께 깡패들과 맞서 철거 시도를 막아내기도 했다.

사목의 핵심은 가난한 주민들이 뭉치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주민들에게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없었다. ‘흙이 없는 땅에 떨어진 씨’라는 박 신부의 표현처럼 각자 계층 향상에 힘쓰느라 사분오열된 그들은 존엄을 되찾는 일에 단합된 힘을 모을 수 없었다. 박 신부는 “주민들을 조직화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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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평화의 집 소장 박문수 신부가 2003년 3월 독립문 지역사회발전센터(이하 센터) 현판식에 앞서 축복하고 있다. 센터는 독립문 평화의 집이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기획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되면서 개소했다. 가톨릭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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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제주 강정마을 일대에서 열린 강정 평화 콘퍼런스에 참석한 박문수 신부(왼쪽에서 두 번째)

■ 함께함으로써 해방을

“빈민 사목은 제일 돈이 없는 사람을 찾아 돌보는 사목이 아니에요. 사회 구조로 인해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해방될 수 있도록, 그들이 단합된 힘으로 사회 구조를 바꿀 수 있도록 함께하는 사목이죠.”

주민 조직화를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들과 관계를 맺고 이웃이 되는 것이 중요했다. 박 신부는 천도빈 활동가로서 세입자들을 대상으로 주거권이 무엇인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교육하는 동시에 친교와 나눔의 자리를 계속 만들어 갔다. 교육과 조직화를 위해서는 주민들과 친해지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화곡동 예수회 신학원에서 자전거를 타고 신정동 철거촌 주민들을 계속 접촉했다. “몸은 수입이어도, 마음은 한국산”이라는 말은 입버릇이었다.

강제 철거를 앞둔 지역에 미리 들어가 스스로 주민이자 이웃이 되기도 했다. 1989년에는 무악동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1990년 독립문 지역 철거를 앞두고 그곳에서 공동체 운동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예수회 신부들과 전세방에서 생활하며 세입자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그 노력으로 200세대에 달하던 세입자들이 가(假)이주 단지를 얻어 살다가 무사히 임대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1999년에는 교수직을 그만두고 서울 무악동선교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는 등 온전히 빈민 사목에 투신했다. 선교본당은 당시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무악동, 삼양동 등 재개발 지역 주민들 삶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세운 도시 공소를 발전시킨 개념의 공동체다. 박 신부는 초대 본당 주임으로서 주민들이 스스로 권익을 찾을 수 있도록 자치회 및 부녀회를 구성하고 청소년 스카우트 운동을 조직하기도 했다.

박 신부는 본당과 주민들 사이 접촉점을 늘리기 위해 본당 부설 협동조합형 자활공동체인 ‘독립문 평화의 집’도 세웠다. ‘독립문 평화의 집’은 종교색 없이 주민들이 함께 주민운동을 펼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구심점이 됐다. “특히 공공임대주택 주민들이 자기들만의 조직을 만들 수 있도록 도움이 됐다”고 박 신부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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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수 신부가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을 멈출 것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들고 있다. 사진 박문수 신부 제공

■ 새롭게 이어지는 ‘연대’

박 신부는 다른 차원의 가난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새로운 ‘동행’의 길, 평화를 위한 ‘연대’의 씨앗을 심는 일에 나섰다.

2009년 선교본당 주임 사목을 마친 박 신부는 바로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이하 연구센터) 설립에 착수, 이듬해 초대 소장으로 취임했다. 연구센터의 목적은 이주노동자와 난민, 소외층을 위해 헌신하는 사회사도직 단체들의 활동을 연구로 지원하고 연대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예수회원들은 “오랜 시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했던 박 신부가 센터장을 맡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초대 센터장으로서 박 신부는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나섰다. 예수회 일본관구와 연대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평화와 군축 세미나를 열고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세미나 및 토론회를 열었다. “환경 보호 측면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평화 운동”이라고 박 신부는 강조했다.

“일본에서도 핵발전소 반대운동은 세계 평화를 요청하는 일본의 평화헌법을 수호하는 운동이었죠. 일본은 히로시마 원폭의 상처를 가진 나라예요.”

강정 해군기지 반대운동처럼 군사주의적 폭력에 맞서는 데도 함께했다. 제주도가 ‘비무장 평화의 섬’이 되길 바라며 2014년부터 강정 평화 콘퍼런스와 평화대회 마련에 동참했다. 시모노세키 노동교육센터와 연대하면서 핵발전소 반대운동에 나설 뿐 아니라 조선학교와 관계를 맺고, 차별받는 재일조선인들을 위로했다.

이렇듯 개발 광풍에 떠밀려 외면받는 빈민들을 ‘동반’하고, 미움과 차별로 멍든 땅에 ‘연대’의 가치를 전해온 박 신부의 선교 여정은 어느덧 55년째에 접어들었다. 반백 년 이상 한국교회와 함께한 그는 끝으로 ‘불평등’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가난을 언급하며 “교회가 세속화되지 말고 가난한 이들과 끝까지 함께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주거 공간이 아닌 투기 대상이 돼버린 집, 무제한 경쟁에 내몰린 청년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불평등입니다. 순교자의 교회인 한국교회가,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사명을 잊지 않길 늘 기도합니다.”

박주헌 기자 ogoya@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