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저를 보내주십시오]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오기백 신부(상)

이형준
입력일 2024-05-31 수정일 2024-06-05 발행일 2024-06-09 제 3396호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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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빈민 위해 지켜온 ‘현장교회’…"치열한 삶 속에서 주님 만났죠"
독재정권 맞서며 노동사목 매진…'재개발'로 탄압 받는 빈민 위해 현장으로

1980년대, 기나긴 독재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던 한국 사회에 또 다른 독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인권이 무시되고 정부에 대한 하소연마저 감시당하던 독재 시기의 한가운데서, 고통에 울부짖던 노동자와 빈민을 위해 몸 바쳐 일한 또 한 명의 선교사가 있다.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와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한 아일랜드 출신의 오기백(Daniel O’Keeffe·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73) 신부를 소개한다.

겨울이 매서웠던 한국 그리고 첫 소임지 흑산도

1976년 2월, 오 신부가 첫발을 디딘 한국의 겨울은 너무나 추웠다. 아일랜드에서 몇 날 몇 시 한국 공항에 도착할 거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그 전보마저도 오래 걸려 공항에는 아무도 마중 나오지 않았다. 막막하던 순간도 잠시, 사람들이 그를 운 좋게 미군으로 착각한 덕에 주한미군용 택시를 얻어 탔다. 극동의 춥고 낯선 나라에서의 첫 경험이었다.

오 신부가 골롬반회에 입회한 건 사실 남아메리카, 특히 칠레로 선교 가고 싶어서였다. 그는 “입회 전 대학에서 스페인어를 공부하기도 했고, 특히 골롬반회는 남아메리카에 주로 선교사를 파견해서 나에게는 골롬반회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제가 부제품 받던 즈음엔 남아메리카 교회가 너무나 불안정한 나머지 경험 없는 젊은 선교사를 보내지 않았어요. 제 꿈이 날아가 버렸다고 느꼈어요. 그 와중에 아시아 끝자락의 ‘한국’으로 파견될 거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행히 친한 선배 선교사 몇이 한국에 있어 싫지만은 않았다. 1년간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스물세 살의 나이에 사제품을 받자마자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 들어온 지 5개월 만에 전남 흑산도로 발령받았다. 오 신부는 “한국어를 아직 잘 못 해 처음엔 선교보다는 문화와 언어를 익히는 데 집중했다”고 회상했다.

젊었던 그는 또래 한국 청년들과 어울리며 한국 문화를 점차 체득했다. 마침내 같은 해 12월, 첫 한국어 미사를 봉헌하기로 했다. 오 신부는 “일부러 신자들이 많이 안 오도록 궂은 날씨를 골라 첫 한국어 미사를 했다”며 웃었다. 주임 신부와 아주머니 셋이 참례했는데, 미사 중 한 아주머니가 그의 어눌한 한국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 신부는 너무 부끄러워 제대 앞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그는 “겨울인데도 너무 긴장한 탓에 땀이 줄줄 흘렀다”고 회상했다.

생활에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아일랜드 고향도 바닷가라 흑산도는 익숙하고 편했다. 오히려 고향보다 중학교 시설이 좋아 놀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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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한국 대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 오기백 신부(오른쪽). 사진 오기백 신부 제공

독재정권 중심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다

오 신부가 1977년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할 때는 노동문제가 한창 불거졌다. 그는 “고(故) 양노엘 신부님이 본국에 잠시 가 있는 동안 세 달간 노동자들과의 미사를 대신 주례했는데, 이때 한국의 노동현실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또 1978년 인천 동일방직공장사건, 1979년 부·마 민주항쟁같이 굵직한 사건들은 그에게 충격을 줬다.

그 후 노동사목에 참여하게 된 오 신부는 부천에 있는 인천교구 삼정동성당에 거주하며 노동자들을 위한 공간 마련을 꾀했다. 메리놀 외방 전교회, 인천교구와 함께 부천에 집을 마련했다. 노동 현장 경험이 많은 활동가도 구해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마침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1981년이었다.

노동자들이 언제든지 올 수 있도록 집의 1층은 열어둬 때로는 그저 잠을 자고 가는 이들도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경찰이 그 집을 탐탁지 않게 여겨 시도 때도 없이 그들을 감시했다. 오 신부는 “당시 근처 심곡동본당 주임 신부님이었던 고(故) 최기산(보니파시오) 주교님과 함께 지역 경찰서장을 직접 찾아가니 우리가 노동자들을 동요케 한다며 말 한마디면 나를 한국에서 내쫓을 수 있다고 겁을 줬다”고 회상했다.

“집에 노동자들이 들락날락하니 경찰이 집 앞에 검문소를 설치해 모든 사람을 검문했습니다. 우리를 빨갱이라고 이상한 소문을 퍼트려 주민들에게 두려움을 조성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인천교구장이셨던 나길모 주교님이 직접 오셔서 지역 신자들에게 노동사목이 무엇인지 설명하시며 안심시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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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백 신부가 서울 봉천9동(현 서울 은천동) 빈민사목 시절 불도저 철거현장에서 시위하고 있다. 사진 오기백 신부 제공

빈민의 권리를 위하여

오기백 신부는 1992년 골롬반회 도시빈민사목의 거점이 있는 서울 봉천9동(현 서울 은천동) 달동네로 소임을 받았다. 주택 소유주와 세입자 간의 갈등은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사회문제였다. 오 신부는 “서울시의 민간 재개발은 철저하게 건축주와 주택 소유권자의 이익만을 위했다”며 “우리 역할은 쫓겨날 처지에 놓인 세입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동반해 주는 거였다”고 말했다.

오 신부는 ‘현장’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골롬반회 선교, 특히 빈민사목에 있어서 현장교회의 특징을 강조했다. 그는 “일반 본당은 전례 생활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모여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 현장교회는 삶을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말했다. 신자라면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하느님은 어디 계시는가를 고민하고, 신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더 인간답게 더불어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그 과정에서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오 신부는 “세입자들에게 재개발의 개념과 과정에 대해 정확히 설명해 그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왔다”며 “또 봉천9동 세입자들이 다른 재개발지역 세입자들과 연대모임을 만들어 서로 경험을 나누고 조언하도록 연결해 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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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오기백 신부가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3주년 기념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사진 오기백 신부 제공

오기백 신부가 본 한국의 노동자·빈민

오 신부는 “한국 현대사의 주인공은 노동자”라며 “주인공인 노동자들이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부천에서 노동사목에 투신할 당시, 노동자 중에는 중학교마저도 졸업하지 못한 열다섯, 열여섯 살의 청소년들도 많았다.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마음 한켠에 열등감을 가진 이도 꽤 됐다. 서울 봉천9동 달동네 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오 신부는 “달동네 신자들은 근처 신림사거리에 있는 크고 웅장한 성당 분위기에 압도돼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자기의 고된 삶과 괴리감을 느껴 스스로 소외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오 신부는 도시빈민사목을 끝으로 한국 지부장에 선출돼 현장을 떠났다. 오랜 인연들과 조금 멀어질 생각에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부장도 하느님의 뜻이자 노동자와 한국 사회를 위해 또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이제는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부장으로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길에 한 발 더 다가섰다고 느꼈지요. 현장사목에서 사제는 원래 잠깐 있다가 떠나는 존재입니다. 노동자·빈민을 위한 사목은 누가 가든 지속될 거라 믿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았지요.”

이형준 기자 june@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