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주의 창

존재의 거룩

박지순
입력일 2024-10-10 수정일 2024-10-15 발행일 2024-10-20 제 3413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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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쌀쌀해진 어느 날 새벽, 살아 숨 쉬는 아기를 상자에 담아 내려놓고 돌아서는 한 어머니가 있다. 이렇게 하는 어머니들의 아픈 마음을 다 알기란 어렵다. 건강한 아기도 있고, 다운증후군에 걸린 아기나 뇌성마비가 온 아기도 있다.

심주희 어린이를 만난 수많은 이들이 물었다. “주희가 고통이 저렇게 심하다면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주희에게는 더 좋지 않을까요?” 그는 1981년 2월 20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았고, 지체 장애와 언어 장애도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놔두고 가출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뇌성마비로 자율신경의 조절 기능을 상실한 그에게는 강직성 마비증세가 나타났다. 한쪽 어깨를 움직이면 양쪽 팔이 탈골돼 고통을 겪곤 했다. 말 한 마디에도 몸이 울려 고통을 겪었다. 한 번 자극을 받으면 주희의 등은 활처럼 휘어졌다. 거꾸로 휘어지는 등. 자세 교정을 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주희는 그 격렬한 고통으로 숨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아버지가 혼자 8년을 돌보며 지내다가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이번에는 아버지가 그를 버렸다. 그런데 주희가 꽃동네에 오고 나서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가 꽃동네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자원봉사를 청했다. 그의 청은 받아들여져서 부녀가 함께 꽃동네에서 행복하게 살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아버지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꽃동네 사람들은 염려했다. 아프고 힘들 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가 없어지면서, 더군다나 이번까지 부모에게 세 번이나 버려지는 상황에 직면해서, 그가 겪을 고통과 상처가 얼마나 깊을까 걱정하면서 너무도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가 떠난 후에도 ‘수선화 같은 그 고운 미소를 잃지 않고’ 하루하루 날들을 맞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의사 수도자인 예수의 꽃동네 형제회·자매회 신상현(야고보) 수사가 물었다. “너를 세 번씩이나 버린 부모가 밉지 않니?” 그러자 그는 온 존재로 내는 한 마디 한 마디 말들을 모아 경어로 답했다. “선생님, 전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어디 계시든지 잘 사시라고요. 요즘은 기도를 하다 보면 시간이 모자랄 정도예요.”

주희는 1995년 4월 4일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급성호흡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음을 맞기 전 자기를 돌보기 위해 온 신 수사에게 늘 그렇듯 경어로 말했다. “선생님, 엄마 아빠 한 번만이라도 꼭 보고 싶어요.”, “너를 버린 미운 사람들인데도?”, “그래도 엄마 아빠예요. 부모님 용서는 벌써 했어요. 그런데 욕심이 생기는지 자꾸만 보고 싶어져요.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요.” 그는 끝내 이들을 만나지 못했다. 그가 귀천하고 장례식이 있던 날, 그의 아버지가 왔다가 장례가 끝난 뒤에 그가 사랑한 딸 심주희 그를 가슴에 품고 다시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심주희, 그는 자신의 온 존재, 고통으로 점철된 자신의 온 삶으로 우리에게 탄생은,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 숨 쉬는 삶은 ‘한 상태’, 고통보다 축복이 더 큰 상태라는 것을 증거했다. 이 신학적 진리를 식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탄생(삶) = 상태(축복 > 고통)’

한 존재가 자기 존재의 원뿌리에 닿아서 부르는 존재의 노래, 저 탄생과 삶의 진리를 증거한 증거자 심주희가 죽기 직전 갈망으로 애타하며 말했다. “욕심이 생기는지 자꾸만 보고 싶어져요.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요.”

자기 존재를 매개해 준 그 존재에 대한 그리움, 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한 존재의 충만을 향한 갈망, 이것이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은 거룩한 갈망이고 그 자체로 ‘엄청난 축복’인데, 우리는 심주희처럼 자신의 이 같은 갈망을 알고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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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황종열 레오(가톨릭꽃동네대학교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