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사막으로 떠난 아르세니우스, 형제들과 맞서며 고독한 생활 지켜 ‘물러남’은 나아가기 위한 재충전 시간…‘함께 있음’과 ‘홀로 있음’의 조화 중요
우리가 사막 교부들에게서 듣게 되는 첫 마디는 ‘물러나라’는 권고가 아닐까 한다. 이 권고는 본래 ‘세상에서 달아나라’(fuga mundi), ‘세상에서 물러나라’는 것이다.
아르세니우스의 물러남
물러남의 대표적 인물은 압바 아르세니우스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황실 고관으로 황제의 아들들을 가르쳤던 교사였다. 세상의 온갖 영화를 누렸던 고관대작이 어느 날 내면의 소리를 듣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집트 사막으로 물러났다. 아르세니우스에 관한 금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황궁에 살던 시절에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이끄소서.’ 한 소리가 그에게 들려왔다. ‘아르세니우스 사람들을 피해라. 그러면 구원될 것이다.’ 고독한 생활로 나아가면서 그는 다시 같은 기도를 바쳤는데,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르세니우스,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아르세니우스 1-2)
‘물러나라, 침묵하라, 그리고 평화 중에 머물러라’는 권고는 구원을 위한 길로 간주되어 이후 수많은 동방 수도승의 모토요 생활 지침이 되곤 하였다. 아르세니우스는 이를 극단적으로 실행에 옮긴 대표적 인물로 제시된다. 아르세니우스는 스케티스 사막(4세기 이집트 북부의 수도승 생활 중심지 중 하나)의 한 암자에 살면서 암자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는 철저하게 고독과 고요를 지키려 했다. 그래서 로마의 한 귀부인이 그를 보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찾아왔는데도 아주 매몰차게 대하였다.(아르세니우스 28)
그는 고요를 지키려고 주교들과 심지어 자기 형제들과도 맞섰다. “압바 마르쿠스가 압바 아르세니우스에게 말했다. ‘왜 우리를 피하시는 겁니까?’ 원로가 그에게 말했다. ‘하느님은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시오. 하지만 나는 하느님과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없소. 수천수만의 하늘의 군대는 하나의 뜻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많은 뜻을 가지고 있소.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자고 하느님을 떠날 수 없소.’”(아르세니우스 13)
물러남의 이유
4세기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고독과 고요를 찾아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는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 고독과 고요 속에서 하느님만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독과 고요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지 않고 하느님과 더욱 깊은 내적 일치에 이르는 데 있다. 고독과 침묵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력 없이 우리는 결코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각자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세상의 온갖 근심·걱정에서 벗어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이 복음서에서 권고하시는 자녀다운 신뢰의 덕을 뜻한다. 즉 이 지상 생활의 근심과 일시적 상황에 대한 걱정을 밀쳐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겨드린다는 뜻이다.
‘물러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사막 교부들처럼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기는 더더욱 어렵다. 아니 우리에게는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사막으로 물러난 동기와 목적은 적어도 우리에게 참된 신앙인의 목표와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우리의 물러남
우리는 분명 가정과 사회를 떠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떠나 모두 사막으로 물러날 수 없다. 우리가 떠나야 하는 세상은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 세속적 가치와 정신, 혈연과 지연과 학연이라는 울타리,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 찬 우리 자신의 에고일 것이다. 이런 것을 끊임없이 내려놓고 하느님과의 일치를 위한 고독과 고요의 시간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홀로 있는 때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삶에서 ‘함께’와 ‘홀로’의 조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있음’이 사람들과의 친교의 때라면, ‘홀로 있음’은 고독과 고요의 때다.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일상과 사람들에게서 물러나 고독과 고요 중에 머무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사람들과 하느님과 동시에 있기는 참 어렵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낄 수 있지만 홀로 있는 고독과 고요의 시간은 전적으로 하느님 안에 몰입하는 시간이다.
예수님도 이 두 순간을 조화시키려 노력하셨다. 사람들과 함께 머무시며 그들의 필요에 봉사하셨지만, 어떤 결정적 결단의 순간이라든지 유혹의 때 혹은 재충전이 필요한 때에는 늘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셨다. 홀로의 시간을 마련하셨던 것이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시며 그분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사람들에게로 되돌아가셨다.
고독과 고요의 의미와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은 공허할 수 있다. 사람들과 함께 머물며 친교를 나누는 것 같지만 마음은 늘 부평초처럼 떠다닐 수 있다. 우리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거기서 자양분을 끌어 올릴 때 우리가 맺게 될 친교의 열매도 튼실할 것이다. 우리는 고독과 침묵을 모르고 인간적 친교만을 추구하며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는 사람의 가벼움과 공허함을 종종 보게 된다. ‘홀로 있음’은 우리의 근원이신 하느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요, ‘함께 있음’은 뿌리에서 올라오는 자양분으로 열매를 맺는 시간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일상에서 물러나 홀로 고요히 침묵 중에 머무르는 시간은 너무도 중요하다. 특히 앞만 바라보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다. 물러남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정이나 어떤 식으로든, 정기적으로 일상에서 물러나는 지혜를 발휘해 보는 것은 어떨까?
▶ 본문에서 인용된 사막 교부의 일화나 말의 출처는 알파벳순 모음집 사막 교부들의 금언(베네딕다 워드, 「사막 교부들의 금언」, 허성석 옮김, 분도출판사 2017 참조)이다.
글 _ 허성석 로무알도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수련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