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르네상스 성당 스케치] 조토 디 본도네

이형준
입력일 2025-01-02 16:27:47 수정일 2025-01-06 09:18:30 발행일 2025-01-12 제 3425호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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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은행업 발달로 실용주의 번져
중세엔 비현실적으로 성화 그렸지만
조토는 성인 그리면서도 현실감 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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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의 초상화. 출처 위키미디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모두 시대의 이름이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는 낯설거나 모르는 표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한 우리의 인식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대 안에서조차 문학, 미술, 건축 등 분야에 따라 그 시작 시점이 다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문학 분야가 먼저였고, 다음이 미술 분야이며, 성당을 포함한 건축 분야가 가장 늦습니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적으로 우리 삶 안에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 흐름을 따라 문학에 이어 미술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미술 분야에서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 가운데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1267-1337)라는 피렌체 사람이 있습니다.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조토는 피렌체 외곽 베스피냐노 마을의 양 치는 목동이었는데 어느 날 그가 뾰족한 돌로 바위에 양 떼를 그리는 것을 마침 그곳을 지나던 치마부에(Giovanni Cimabue·1240–1302)가 보게 되었답니다. 그림을 본 그는 조토를 제자로 삼기로 하고 피렌체로 데리고 왔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의 모습을 보이는 그대로 그리던 조토는 그렇게 치마부에로부터 사실주의적 화법을 체계적으로 배워 익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조토는 스승이 그린 인물화를 감상하다가 장난기가 발동하여 잘생긴 코에 파리 한 마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잠시 후 외출에서 돌아온 치마부에는 코에 앉은 파리를 보고, 손을 흔들어 쫓으려 했습니다. 물론 파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제자의 사실주의적 표현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오른 것을 본 스승은 허공을 가른 길 잃은 손으로 “이 녀석!” 하며 멋쩍은 꿀밤을 주었을 것만 같습니다.

중세 시대의 성화를 보면, 등장인물이 실제 모습이 아닌 성경 속의 비중에 따라 위치와 크기 및 묘사의 정도가 정해지고 배경 역시 성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 금색으로 처리됩니다. 하지만 조토의 그림은 인물들의 위치와 크기가 실제에 가깝고, 그 자세와 표정도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묘사됩니다. 그림의 배경도 자연 풍경이나 건물로 처리됩니다. 이런 화법은 비잔틴의 영향을 받아 추상적이고 비물질적으로 표현되었던 중세의 그림과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 조토의 활동 시기가 르네상스의 꽃이 피어난 때라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시대적 분위기는 이미 비합리주의적 신비주의보다 사실주의를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경제 분야에서도 무역과 은행업은 합리주의와 사실주의에 기초하여 발전하였습니다. 정확한 계산을 전제로 하는 상업 분야의 융성으로, 추상적인 것보다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사고가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조토 역시 이러한 실용주의적인 사회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젖어 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조토가 사실주의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 내용은 여전히 성경이나 성인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회화의 대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표현 방식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조토는 평생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프레스코화의 특징 때문에 아쉽게도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그가 피렌체를 떠나 첫 번째로 맡은 작품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성당 프레스코화 작업으로 추측됩니다. 1253년에 완공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성당은 수도회의 창설자인 프란치스코 성인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프란치스코회(작은 형제회)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90년 전후로 조토는 대성당의 상부 성당 벽면에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와 전설을 28개의 프레스코화에 담아냈는데, 특별히 보나벤투라(Bonaventura·1221–1274)가 쓴 성인의 전기를 바탕으로 사실에 가깝게 묘사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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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 <조토의 십자가>. 출처 RightLeft Medieval art

그런데 이 프레스코화 연작에 십자가가 한 번 등장합니다. 그리고 조토는 비슷한 시기에 이것과 같은 모양의 십자가를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에도 봉헌합니다. 조토의 십자가는, 다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숙여서 표현된 것과 달리, 그리스도의 몸이 수직으로 표현되어서 구부러진 다리에 몸의 무게가 더 많이 실리게 보이는 점이 특징입니다. 자신 몸을 가누지 못하고 힘겹게 지탱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가 십자가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죽음 앞에서 거룩하고 품위 있는 모습이 아니라,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는 참사람으로 오신 구원자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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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토가 그린 스크로베니 경당 <최후의 심판>. 강한수 신부 제공

조토의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1303년부터 1305년에 작업한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경당 프레스코화입니다. 경당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이 연작은 안나와 요아킴, 마리아, 예수의 탄생과 유년 시절, 공생활,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 최후의 심판 등 구원 역사의 중요한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의 최고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들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조토의 진품을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구세사의 중요한 사건들 외에 양쪽 벽면 하부에, 사추덕(현명, 용기, 절제, 정의)과 향주삼덕(믿음, 사랑, 희망)으로 구성된 ‘7개 덕’과 절망, 질투, 불신, 불의, 분노, 불안, 어리석음의 ‘7개 악덕’을 상징하는 14개의 알레고리가 무채색으로 그려져 서로 마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출입구 상부의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그리스도는 나팔을 부는 천사들에 둘러싸여 후광이 빛나는 가운데 심판을 하는 단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조토는 건축에도 재능을 보여,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시작한 고딕 양식의 피렌체 대성당 공사를 이어 맡았고, 그때 그 유명한 조토의 종탑을 세웠습니다. 이 종탑은 설계와 재료 면에서 대성당과 조화를 이루도록 고딕 양식을 취하면서도, 내력벽의 두께를 줄이는 대담함을 보임으로써 구조 역학 측면에서 수준 높은 기술의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조토는 1337년 일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피렌체 대성당의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조토는 인물의 표정과 태도를 사실적으로 표현하며 마치 감정을 가지고 대화하고 있는 듯한 회화를 구현한 최초의 화가입니다. 그래서 그는 미술 분야에서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평가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마도 당시 피렌체의 고딕 건축을 주도했던 노장 아르놀포도 조토의 이런 모습을 보고 시대의 기류를 조금은 감지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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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강한수 가롤로 신부(의정부교구 건축신학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