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직접, 두 번이나 언급한 ‘한처음’(마태 19,3; 마르 10,2)은 모든 인간의 근원이기도 하다. 한처음에 중심을 두고 바리사이들이 한 질문을 다시 들어보자.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 질문의 핵심은 무엇일까?
왜, 그와 내가 행복을 꿈꾸고 시작했던 혼인 생활을 끝내려 할까? 왜, 시작한 축성/봉헌생활을 그만두려 할까? 맞지 않아서? 두 사람은 원래 다르다. 겉만 다른 것이 아니라 구석구석 속속들이 다르다. 그러니 다름은 이혼 사유가 안 된다. 큰 어려움이 있어서? 그것도 아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서로 다독이고 힘을 내자고 한다. 그럼 원인이 무엇일까? 연애하고 결혼할 때는 사랑이 넘쳤는데 지금은 고갈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사랑으로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의 핵심은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이다. 사람과 사랑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한처음’, 즉 너의 근원으로 돌아가 스스로 그 답을 찾으라 하신 것이다.
한처음을 확대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4장 1절까지를 말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타락하기 전 본성의 상태를, 3장에서 4장 1절까지는 타락한 본성의 상태를 말한다. 역사의 인간은 이 둘이 통합된 본성이지만, 우리는 구원된 상태로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이들이다. 두 상황의 경계선상에서 처음 상태를 기억하고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몸 신학의 전망이요 신학적 인간학이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마음이 완고하여(마태 19,8; 마르 10,5) 모세의 율법을 들어 이혼을 합법화했지만, 예수는 하느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한 의미, 혼인과 사랑에 대한 본래의 의미를 찾도록 촉구한 것이다.
‘사랑’은 영원할 수 없다고 질문했는데 ‘사람’으로 응답한 것이다. 사람이 먼저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했던 사과 이야기로 되돌아가자. 알록달록하게 생긴 사과 하나가 창세기 1장에서 4장 1절의 나이다. 반으로 잘라 오른쪽에 있는 것이 창세기 1장과 2장 상태의 나이고, 왼쪽에 있는 것은 창세기 3장에서 4장 1절의 상태의 나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인간에 대한 이해를 창세기 3장 1절에서부터 교육받았고, 또 결의론적으로 이해했다. 즉 원죄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제 그 껍질을 벗고 규범론적으로 만나보자. 왜 그래야 하는가?
삶은 무엇보다 표현이고, 이 표현에 변화를 줄 때가 왔다. 이 가르침은 내 삶의 변화를 희망하고 도전하는 용기를 얻게 한다. 머리론 알지만 행동에는 두려움이 앞서기에 나를 숨기려 갈등하는 나에게 나의 근원과 완성을 바라보고 깨어 있어라 한다. 결국 이 가르침은 내가 어디에 있어야 함을 아는 것이요, 그 앎의 자리에 내가 있기 위함이다. 창세기는 이렇게 전한다.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들은 사람과 그의 아내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며 “너, 어디에 있느냐?”(창세 3,9)라고 물으셨다. ‘무엇을 했느냐?’, ‘왜 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느냐?’ 하지 않고, “어디에 있느냐?” 물으신 것이다. 지금 네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이고,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곧 존재로서 나의 정체성, 그리고 당신과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자유로운 인격적 행위는 자신의 책임하에 있고, 그분은 저 먼 곳에 계신 것이 아니라 나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글 _ 김혜숙 막시마(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지난호(1월 12일자) ‘하느님 계획 안의 인간 사랑 – 몸 신학 교리’는 편집과정 상의 오류로 김혜숙 선교사님이 보내주신 원고가 아닌 다른 글이 게재됐습니다. 이에 이번 호에 다시 게재합니다. 게재 오류로 불편을 겪으신 김혜숙 선교사님과 독자 여러분께 깊은 사과 말씀 올립니다.